올해도 어김없었다. 스마트폰의 SNS 울림이 부쩍 잦아지면서 명절이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대충 짐작은 해도 열어 보지 않을 순 없는 노릇. 개중엔 얼굴도 가물가물한 이들로부터의 소식도 있다. 내용이야 모두가 익히 아는 대로다. ‘즐겁고 행복한 설’을 보내라는 축원이다. 하지만 일껏 보내준 명절 인사가 고맙긴 해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건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단순히 전자기기 속 문자에서 느끼는 생경함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만에 가족과 친지가 모이니 당연히 그래야 겠지만, 과연 명절이 모두에게 즐겁고 행복할까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도 한몫 했을 터이다.
즐겁고 행복해야 할 명절을 이처럼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게 정상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명절이 일 년에 두 번 거쳐야 할 ‘피곤한’ 통과의례가 돼버린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어느새 다양한 ‘증후군’을 동반하는 반갑잖은 대상이 된 것이다. 명절 전후 이 골치 아픈 증후군의 예방과 퇴치를 안내하는 기사가 약방의 감초처럼 언론에 등장한 지도 오래됐다. 명절증후군의 실체를 단정적으로 규정 짓긴 어렵다. 그러나 그 근원에는 급속한 세태 변화에 따른 가족 구성원 간 복합적인 갈등이 자리잡고 있고, 이는 사회적 갈등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남녀 간, 세대 간 갈등이 농축돼 있는 것이다.
그래선지 자칫하다간 명절 풍경이 험악하게 변하곤 한다. 아내나 며느리에게 음식 내와라, 치워라 하며 남자들만의 술판을 벌이다간 다음 명절을 기약하기 힘들다. 눈치 없이 조카의 취직이나 결혼을 다그치다간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오죽하면 명절에 피해야 할 금기어까지 소개하는 언론 기사가 넘쳐날까. 이러니 즐거워야 할 명절이 살얼음판이 아닐 수 없다. 명절 내내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고 서로 눈치를 봐가며 그럭저럭 넘기면 다행이다.
여기까진 그렇다 치자. 그나마 세상이 많이 나아진 덕분에 배려하는 명절 문화가 어느 정도 자리잡아 가고 있는 듯해서다. 그런데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다. 이른바 진영 갈등이다. 이 또한 연원이 오래되긴 했다. 진영 갈등까진 아니더라도, 가족 친지들이 오랜만에 모이는 자리니 정치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는 법. 자연스레 명절 전 정치 현안을 두고 의견을 내다보면 다소간 삐걱거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요즘은 양상이 달라졌다. 지난해 추석 전 우리 사회를 뒤흔든 조국 사태부터다. 당시 추석 때 조국이란 두 글자는 누구도 입밖에 내서는 안 될 금기어 1순위였다. 그럼에도 결국 조국 사태를 둘러싼 언쟁으로 명절 분위기가 험악했다는 경험담이 쏟아졌다.
비록 가족 친지 간 다툼이긴 해도 조국 사태를 둘러싼 진영 갈등엔 세대도 남녀도 없었다. 대다수가 이분법적인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한 치의 양보도 없었으니 합리적인 논쟁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하긴 대한민국이 두 쪽으로 갈린 판국에 가족 친지 간이라고 별 다를 수도 없었다. 지난해 추석은 이 같은 살풍경 속에 지나갔지만, 그 여파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해 추석의 학습효과 때문인지, 올 설을 앞두고도 정치 이야기는 주제만 달라졌을 뿐 첫 번째 금기어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올 설 연휴가 끝났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과연 이번 명절이 즐겁고 행복했는지 다시금 묻고 싶다. 누군가는 지난 추석 때 경험을 떠올리며 말들을 자제했겠지만, 또 누군가는 험악한 살풍경을 재연했을 것이다. 어찌 됐건 이게 대한민국의 새로운 명절 풍속도가 됐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우리 사회 진영 갈등이 명절 밥상머리마저 살벌하게 만들 지경이 됐다는 건 결코 정상적인 게 아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닫거나, 다시는 못 볼 사이인 듯 등을 돌려버리게 하는 명절이 결코 즐겁고 행복할 수는 없다.
설 연휴가 끝나면서 정치권은 어김없이 고향에서 들은 명절 민심을 전했다. 하지만 그들이 전하는 민심이란 게 참으로 신기하다. 매번 자기 진영에 유리한 민심만 확인한다는 점이다. 야당은 정권 심판론이, 여당은 야당 심판론이 우세했다는 제 논에 물대기식 민심이다. 하긴 민심을 이처럼 제 입맛대로 갖다 붙이니 나라가, 가족 친지가 더더욱 두 쪽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여야 모두 통합과 협치를 외쳐대니 이런 코미디도 없다.
어느 사회든 갈등이 없을 수는 없고, 이는 가족 친지 간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회적 갈등이 지나쳐 가족 친지 간 갈등을 증폭시키는 지경까지 이르면 문제는 달라진다. 가장 작은 가족 공동체마저 정치판 갈등에 휩싸이는 사회가 온전히 발전하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니 다가오는 올 추석 땐 또 어떤 폭탄이 갈등의 기폭제가 될지 걱정이 앞선다. 이러다간 그야말로 이번 명절엔 싸우지 말고 무탈하게 보내라는 덕담이 오가는 이상한 세상이 오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논설실장 jj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