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온 국민이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와중에 외상센터를 두고 벌어진 모 대학병원 의료진과 경영진 사이의 갈등은 어느새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해묵은 갈등에는 응급환자를 실어 온 헬리콥터의 소음 민원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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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서상균 |
헬리콥터를 이용한 환자 수송 체계가 처음 도입되고 눈부시게 발전한 곳은 놀랍게도 우리나라다. 그것도 70년 전이다. 짐작하듯 6·25전쟁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한 것은 아니고 미군이 이룬 일이다. 탈 만한 헬리콥터는 1941년 등장한다. 헬리콥터를 이용해 조종사를 구출하는 일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1950년 8월이 되면 미군은 전선에서 후방으로 부상병을 재빨리 후송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띄운다.
한반도는 미군에게 지독하고도 낯선 땅이었다. 지루한 장마, 열악한 도로, 가파른 산악, 발이 푹푹 빠지는 논밭, 군화로 걷기 너무 힘든 논두렁 …. 기존 육상 운송 수단들은 한반도에서는 꼼짝없이 발이 묶이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헬리콥터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적진에 추락한 조종사를 구출할 때는 위생병이 동승하여 후송 중에도 상처를 소독하고, 압박 붕대를 감고, 페니실린을 주사하고, 수혈도 했다. 재빠른 후송만이 아니라 신속한 처치까지 하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닥터 헬리콥터’의 역할을 했다.
6·25전쟁 중에 헬리콥터로 후송된 부상병은 1만8000명이었고, 미군 부상병의 88%는 늦어도 2시간 안에 수술을 받았다. 부상병들의 회복 상황도 좋아지고, 군의 사기도 올랐다. 6·25전쟁으로 얻은 경험은 베트남전쟁에서 더 큰 빛을 본다. 무려 12만 명이, 평균 35분 만에 헬리콥터로 후송될 정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헬리콥터 후송은 우리 국군 장병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병력 규모를 감안한다면 국군 부상병은 3만6000명이 헬리콥터로 후송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질 못했다. 국군 부상병은 경쾌한 엔진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미군의 구급 헬리콥터를 보며 씁쓸했을 것이다. 골든 타임을 놓쳐 목숨을 잃은 전우들의 사늘한 주검을 보며 힘없는 나라의 국민인 우리 처지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국군이 독자적으로 항공후송중대를 창설한 것은 반세기가 지난 1998년이었다. 지금은 소방청, 경찰청, 산림청, 해경청의 헬리콥터들이 환자를 실어나른다. 2019년 한 해에만 1800건 이상의 응급환자 후송이 헬리콥터로 이뤄졌다. 2011년부터는 의료진이 탑승해 치료와 후송을 병행할 수 있는 ‘닥터 헬리콥터’가 도입돼 현재 7대가 운용 중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전이자, 뿌듯한 일인가?
하지만 언론에서 보도됐듯 병원 입장에서 보면 외상센터와 닥터 헬리콥터는 천덕꾸러기라고 한다. 모두 기피하는 외상센터 근무는 만성적인 인력난에 과중한 업무 부담으로 있는 사람들도 떨어져 나가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병원으로서는 중증 외상 환자를 치료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데다가 헬리콥터 소음에 대한 민원으로 어지간히 신경이 쓰인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외상센터는 구색만 갖추거나 아예 없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참 부끄럽다. 무엇보다도 70년 전 전쟁터에서 미군 후송 헬리콥터를 마냥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국군 장병들에게 부끄럽고, 70년 동안 항공 후송 체계를 갖추는 데 노력하신 분들께도 면목 없는 일이다. 더 나아가면 미래에 외상센터나 구급 헬리콥터로 큰 도움을 받을 우리 자신들에게 창피한 일이다. 일부의 소원대로 외상센터의 불이 꺼지고, 시끄러운 헬리콥터의 이착륙도 멈춘다면 그런 날은 어떤 날일지 상상할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되지 않을까?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