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학교교육은 대중화되고 학문 중심 교육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현대인은 수많은 지식을 생산·유통하는 ‘지식 소비’ 시대를 살고 있다. 지식이라는 말보다 오히려 ‘정보’라는 용어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지식 추구의 치열함보다 지식의 외양에 더 매달린다. 손 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의 대대적 보급이 그렇게 만들었다.
과학기술 발달은 오늘의 지식정보사회를 만들어냈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이 정보의 노예가 된 것은 바로 기술의 과잉에서 비롯된 부정적 결과라 할 수 있다. 오래전 조지 오웰이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풍자한 ‘동물농장’에서 정보사회의 미래를 예측하고 독재자의 정보 독점과 통제를 우려한 바 있다. 올더스 헉슬리도 유토피아를 묘사한 ‘멋진 신세계’에서 기계 문명 발달이 구성원을 철저히 통제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 것임을 경계했다. 정보의 과잉 생산 및 전달에서 오는 참된 정보의 부재를 염려했다.
지식의 분출과 소용돌이 속에서 학교교육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학생은 학교에서 교과별로 진열된 지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서핑한다. ‘파워포인트’가 지식 관광을 더욱 가속했다. 오로지 지식을 잘 전시하거나 치장하는 데만 심혈을 기울인다. 교사는 지식을 전시하기에 바쁘고 학생 또한 배움을 과시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이렇게 가벼운 지식만을 전달하는 수업 분위기에서 오래 익혀야 배울 수 있는 지식이나 진리 그리고 된장처럼 숙성시켜야 그 빛을 발하는 암묵적 지식은 교육과정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수업 현장도 ‘학습(學習)’ 중에 ‘학’만 있고 ‘습’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이벤트성 수업시간에 교사들은 지식을 전시·나열하기에 바쁘다. 차차 익혀가면서 느끼게 되는 배움의 즐거움이 가차 없이 생략되고 있다. 학교 수업은 지식이 거쳐 가는 통과의례 구실만 할 뿐 그 과정에서 지식이 생성되는 측면이 도외시된다. 영국의 매튜 아놀드 교장은 ‘교양과 무질서’라는 책에서 정보·지식을 많이 갖게 됐지만, ‘교양’이나 ‘문화’가 없는 지식인을 질타했다. 교양 없는 반쪽 지식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교양 없는 정보·지식 소비를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 그 돌파구는 지식을 교양 있게 만드는 ‘인문학 수업’을 부흥하는 길밖에 없다. 법철학자 너스바움은 저서 ‘인간성 수업’에서 습관 및 인습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감수성과 경계심을 갖춘 세계시민을 길러내는 인문교육을 강조한다. 자신과 자신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능력, 자신을 단순히 특정 지역이나 집단의 시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과 더욱 넓은 글로벌 연대를 할 수 있는 관계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능력, 타인 입장을 지성적으로 읽어내는 감정이입 능력을 매우 중시한다.
너스바움은 이런 능력의 원천을 위대한 책 읽기에서 찾는다. 인문정신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깊이 있는 책읽기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우리 사회의 ‘책 읽는 사회’ ‘책 읽는 도시’ ‘책 읽는 마을’ ‘책 읽는 학교’ ‘책 읽는 가정’이 주목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가운데 학교의 책 읽기 운동이 관심을 끈다. 하지만 학교는 책 읽을 여유가 없다. 학교(school)의 어원이 ‘여가(leisure)’라고 하는데 여유가 없는 학교가 된 지 오래다. 고대 그리스어로 ‘스콜레(schole)’란 ‘한가함’ ‘여가’를 뜻한다. 어느 정도 속세에 물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는 자유로운 공부는 학문을 위한 탐구, 자아성찰, 토론으로 이어져 오늘날 학교(school)의 어원이 됐다. 한적함, 조용함을 향유하는 쉼이 있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져야 온전한 공부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쟁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고 평화를 위한 도구여야 한다며 ‘일’도 ‘공부’도 ‘여가’를 위한 수단이 돼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지 않으면 여유를 잃어버린 삶 속에서 전쟁 같은 일상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하다면 학교를 전쟁터로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 학교가 공부의 여유를 찾으려면 휴대전화 정보에서 해방돼야 한다. 휴대전화 정보로는 세상 질서와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정보의 노예에서 자유로워지는 독서인이 되어야 비로소 교양 있는 시민의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부산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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