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 소식, 갑갑한 일상사와 답답한 심정을 일거에 씻어준 낭보다. 밤잠이 가셔질 정도였으니까.
영화인만의 승리가 아닌 국민 모두와 대한민국의 승리건만,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4개 부문 수상에 이르러서는 무딘 붓끝이 부끄러울 따름이건만, 금정산정 고당봉에 올라 만세삼창으로 자축하고 산자락 새벽시장, 희망시장으로 내려와 선남선녀 더불어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건만, 가슴 한구석이 허허롭고 착잡한 것은 웬일인가?
시나리오, 티브이와 라디오 드라마, 심지어 희곡의 어원이자 연극과 이음동의어인 drama(드라마)마저 문학을 떠나 종합예술의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사실이, 적지 않은 극작가가 문인 자리를 떠나 연극인 자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실이 그 이유일까. 희곡이 문학 중심의 종합예술인 연극의 3요소, 희곡·배우·관객 중 최초 최후의 요소로 군림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떠나고 있다니. 문학 아니라고 한다니.
밀레니엄시대 초기만 해도 절대다수 종합문예지가 시 소설 희곡 수필 순서로 편집하고, 문학사에 밝은 편집인은 발생순으로 희곡을 소설 앞에 넣기도 했는데. 원작자는 자신의 드라마나 시나리오가 문예지에 수록되는 것이 예술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여겨 기뻐했는데. 불과 이십수년 전 일인데.
김소월 조지훈 김동리 황순원 등 문학사적 시인 작가가 마중물이었고, 1900년대 종반에 이르기까지 스타 문인들이 주도하던 문학 전성시대는 거기까지인가?
영화는 흑백 화면에 오늘의 대형 티브이 크기도 되지 않게 쪼끄마니 출발했다. 그렇게 101년 전 한국에 들어온 영화가 노벨상 이상인 아카데미상을, 그것도 핵심 부문으로 공인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을 쓸어 담은 2020년 2월! 영화인이 영광의 승리를 위하여 ‘딴따라’라 천대받으면서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문학은 인간정신을 말글로 형상화하는 언어예술이기에 예술의 으뜸이라 엄지 척이던 필자는 뭘 했는지. 첨단공학의 총아 전자책 탓에 종이책이 죽어간다는 비명으로, 예의 남 탓으로 세월이나 죽이지 않았는지. 문인자리를 정신적 회전의자로 여기지나 않았는지. 난국에 열 사람의 현자·대가에 원로문인은 뭘 하셨을까. 재능 대신 말글사랑만으로 문학인생을 선택한 물색없는 문단 말석의 필자를 가르쳐주셨으면 좀 좋았을까.
반장 선거와 골목대장 겨루기에서 필살기가 상대를 거짓말쟁이에 가난뱅이로 몰아가기라 한다. 졸지에 가난뱅이에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상대는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둘 중 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이고 변명할수록 남루해지니 그럴 수밖에.
문제는 국회의원선거를 코앞에 두고 벌이는 정치판과 정치인의 작태다. 선거의 순기능은 없어진 지 오래, 인간 윤리도덕마저 사라져버린 역기능이 두렵다가 무섭다. 지역구민 겸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선량을 뽑는 선거이건만 정당의 정책도 본인의 철학도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 예전의 반장선거로 돌아갔거나 퇴행한 듯싶다. 정치도 정쟁도 아닌 증오니까. 증오의 청각언어, 저주니까. 문학의 영향력에 대한 과신은 천진난만한 문인의 착각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탁상담화나 한담의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교과서에 실린 작품이거나 인기 작가의 것으로 한정된다.
남녀노소에게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연중무휴로 대중매체를 타는 선량의 말과 행위일 수밖에 없다. 험담과 모함이 쉽사리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나아가 정경대원(正經大原, 바른 길과 큰 원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다.
인간은 동물이면서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본능과 사유라는 이중성을 지닌 포유동물이기에,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기에 그렇다고 한다면 강변이겠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