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문태준 칼럼] 여든 살 어머니의 만학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2-20 19:23:00
  •  |  본지 26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어머니 시 가운데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것은 위당 정인보의 시 ‘자모사(慈母思)’이다. 모두 40수의 시조로 구성된 ‘자모사’는 자애로운 어머니를 생각하는 노래라는 의미이다. 그 가운데 ‘자모사 12’는 이렇다.
그림 서상균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補空)되고 말어라’. 따뜻한 밥은 남을 주시고 어머니 당신은 찬밥을 드시고, 겨울에는 자식들을 따뜻하게 입히시되 어머니 당신은 얇은 옷으로 추위를 견디시고, 솜치마를 아끼시더니 보공으로 사용하고 말았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보공’은 죽은 사람의 몸이 관 안에서 움직이지 않도록 옷을 채워 넣는 것을 뜻하는데, 대개 이 보공은 망인(亡人)의 옷으로 한다. 다른 사람과 자식들을 위한 어머니의 희생을 생각하게 하는, 절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시이다.

‘나이 따질 때, 왜// 만 몇 살이라는지 아냐?// 누구나 어미 배 속에서 만 년씩 머물다 나오기 때문이여.// 어린 싹이나 갓난 것 보면 나도 모르게 무릎이 접히지.// 삼신할미 품에서 만 살씩 잡수시고 나온 분들이라 그런 겨’. 이 시는 이정록 시인의 시 ‘나이-어머니학교 5’의 일부분이다. 이정록 시인의 어머니의 말씀을 시인이 듣고 받아 적었다고 한다. 이 시도 일종의 어머니 시라고 하겠다. 어머니에 관한 시일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인생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를 시에 담았다고도 하겠다.

어머니의 말씀은 그 자체가 훌륭한 시구(詩句)인 경우가 많다. 삶의 원형질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씀이 조금은 투박하지만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그것보다 훨씬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 시를 배워 처음으로 쓰신 어머니들의 작품을 보노라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여든 살 즈음에 글과 그림을 배운, 스무 분의 순천 어머니가 펴낸 그림일기 책을 본 적이 있다. 가난 때문에, 사는 일에 숨이 가빠서 하지 못하다가 연세가 드셔서야 글을 배우고, 그리하여 이름과 주소를 직접 쓰게 되었고, 더 용기를 내서 그림을 배운 어머니들의 글과 그림은 감동 그 자체였다.

책에서 안안심 어머니는 당신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내 이름은 안안심입니다. 나이는 78세입니다. 태어난 곳은 보성군 웅치면 삼수마을입니다. 4남 2녀 중 큰딸입니다. 어릴 때 별명은 ‘봉숭아꽃’이라고 불렸습니다. 장독대 봉숭아처럼 예쁘다고 했습니다. 성격은 차분하고 속이 깊은 편입니다. 얼굴은 둥글고 체격은 보통입니다. 가장 부러운 사람은 야무지게 말 잘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소원은 건강하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동심이 일흔여덟의 연세에 이르도록 그대로 보존된 듯한 문장이었다.

얼마 전 홍성군에 갔을 때 전만성 화가를 뵐 기회가 있었다. 전만성 화가는 홍성 마을 만들기 센터에서 주관하는 ‘창조적 마을 만들기’ 사업에 참여했다고 했다. 농한기인 지난해 12월에서 올해 1월 중순까지 열다섯 차례에 걸쳐 홍성군 장곡면 천태리 마을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이야기 그림 그리기를 지도했다고 했다. 열네 분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 수업까지 마친 분은 예닐곱 분이었고 그 성과를 책으로 묶었다. 나도 부탁을 드려 책 한 권을 받을 수 있었다. 전만성 화가는 어르신들의 그림이 “작위성을 초월한 놀이의 즐거움”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어르신들의 그림은 재미있고 활기차고 유쾌했다. 어르신들은 천태리의 소나무, 설날의 세배 풍경, 집 마당의 화단, 암탉과 수탉과 병아리, 여름과 가을날의 산과 나무, 집과 가족, 기르는 소 등을 그렸는데 색조도 다르고 색의 배합도 독특했다. 또 어떤 그림은 봄처럼 화사했다. 어떤 어르신은 “잠이 안 올 때 그림 그리니 좋던데!”라며 이야기 그림 그리기 수업이 끝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했다. 전만성 화가는 아주 작은 것에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어르신들의 천진함이 자신의 모난 마음을 달래주었고, 순수한 조형성과 창조성을 보여준 어르신들의 그림을 접하면서 화가로서 오랜 시간 찾던 답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어르신이 쓰신 편지를 보여주었다. “아들에게. 너에게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펜을 잡고 보니 할 말이 없다. 지난번에 집에 다녀간 후로 열심히 근무하고 있는지? 집 생각은 잠시라도 하지 말고 네 직장에 충실해라. 이곳은 엄마의 덕분에 매사가 잘 되어가고 있으니 염려치 말아라.” 짧은 편지였지만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잘 담겨 있는, 순정한 문장들이었다.

만학이지만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어머니들의 사연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다큐 영화 ‘시인 할매’ ‘칠곡 가시나들’이 개봉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 2리에 사는 강금연 어머니와 동네 어르신들은 두 권의 시집을 펴내며 시인이 되었다. 전남 곡성군 입면 탑동마을 어머니들도 한글을 배워 시를 짓고 그것을 시집으로 묶었다. 1937년에 태어난 윤금순 어머니가 쓴 시 ‘눈’은 아주 좋았다.

“사박사박/ 장독에도/ 지붕에도/ 대나무에도/ 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이라고 쓴 시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교를 버린 시였다. 삶의 기록과도 같은 시였다. ‘사박사박’은 눈을 가볍게 밟는 소리나 모양이다. 하얀 눈이 내린 곳은 장독과 지붕과 대나무 그리고 당신의 머리 위이다. 장독과 지붕과 대나무에 내린 눈은 적설(積雪)로서의 흰빛일 것이고, 당신 머리 위에 내린 눈은 무상한 세월의 흘러감과 그로 인해 생겨난 흰 머리칼을 뜻하는 것일 테다. 그리하여 “잘 살았다/ 잘 견뎠다”와도 같은, 스스로 넉넉하다고 느끼고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절창의 시구를 낳고, 읽는 이에게는 감정이 북받치어 가슴이 꽉 차는 듯한 문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일 테다.

만학을 하는 어머니들은 우리에게 학교이다. 어머니는 평소에 큰 사랑을 가르치시지만, 만학을 통해 짓고 그린 매우 개성적인 작품들을 통해서는 훼손되지 않은 깨끗한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시인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뭐라노 구독 이벤트

 많이 본 뉴스RSS

  1. 1“국어 독서 29번, 사례 추론하는 데 시간 오래 걸려”
  2. 2수학 가형 등차수열 킬러 문항…“중상위권은 어려웠을 것”
  3. 3민찬홍 출제위원장 “EBS 연계율 70% 수준…예년과 같아”
  4. 4싹 사라진 교문 응원…배웅은 차에서, 격려는 주먹인사로
  5. 5지역위원장 잇단 기소…여당, 보선 앞두고 비상
  6. 6‘예산전’ 존재감 뽐낸 변성완·박성훈…선택의 시간 다가온다
  7. 7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37.4%…취임 후 최저기록
  8. 8대학별 비대면 면접 방식 달라 연습을…자가격리자 논술 응시 허용 여부 확인
  9. 9김해 사회적기업, 취약층에 ‘희망의 빛’
  10. 10윤석열 징계위 10일로 또 연기…문 대통령 “절차 정당·공정성 갖춰라”
  1. 1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37.4%…취임 후 최저기록
  2. 2‘예산전’ 존재감 뽐낸 변성완·박성훈…선택의 시간 다가온다
  3. 3지역위원장 잇단 기소…여당, 보선 앞두고 비상
  4. 4윤석열 징계위 10일로 또 연기…문 대통령 “절차 정당·공정성 갖춰라”
  5. 5[정치 데스크 '인사이드'] 만 39세 뇌과학자 보선판 돌풍 주목
  6. 6특례시 기준 인구 100만…지방자치법 개정안 행안위 통과
  7. 7TK 야당·국토부 반대로 김해 예산 280억 가덕에 못 쓴다
  8. 8윤석열 원전수사 다시 챙기며 반격…청와대는 징계절차 강행 의지
  9. 9이진복 “부산 먹는 물 독립 이룰 것”, 잇단 공약 이슈화로 정책대결 포문
  10. 10눈치 보는 여당 후보군, 정중동 행보만
  1. 1연금 복권 720 제 31회
  2. 2부산관광공사, 친환경 ‘그린 마이스, 그린 부산’ 온라인 캠페인
  3. 3롯데마트 ‘통큰 치킨’ 출시 10주년 할인 이벤트
  4. 4갈길 먼 부산 스마트항만…업계 70% “그게 뭐죠?”
  5. 5극지상식 ‘언택트 골든벨’로 뽐내세요
  6. 6주가지수- 2020년 12월 3일
  7. 7해수부 내년 예산 최대치…북항 정화에 10억 증액
  8. 8해양폐기물 관리 체계화, 4일부터 지자체장 책임
  9. 9상품권부터 IT 제품 할인까지…수험표만 있으면 多 받아요
  10. 101000대 기업 CEO 지역대학 출신 약진
  1. 1싹 사라진 교문 응원…배웅은 차에서, 격려는 주먹인사로
  2. 2“국어 독서 29번, 사례 추론하는 데 시간 오래 걸려”
  3. 3민찬홍 출제위원장 “EBS 연계율 70% 수준…예년과 같아”
  4. 4경남도, 경남 농민 공익직불금 2228억 순차 지급
  5. 5수학 가형 등차수열 킬러 문항…“중상위권은 어려웠을 것”
  6. 6 무학과 무창: 최고의 경지
  7. 7해피-업 희망 프로젝트 <46> ADHD 김찬영 군
  8. 8대학별 비대면 면접 방식 달라 연습을…자가격리자 논술 응시 허용 여부 확인
  9. 9김해 사회적기업, 취약층에 ‘희망의 빛’
  10. 10양산 주거지 내 소규모 제조시설…市, 무단 용도변경 등 합동단속
  1. 1롯데, 스트레일리 붙잡아…비시즌 최대 과제 해결
  2. 2외인 알렉산더·신인 박지원 수혈…kt, 순위경쟁 걱정마
  3. 3‘꿈의 무대’ F1 태극기 달고 달린다…영국 드라이버 한세용 주말 정식 데뷔
  4. 4손흥민 2년 연속 ‘올해의 선수상’
  5. 5훈련 불참 이강인 코로나 감염설
  6. 6댄 스트레일리, 내년에도 롯데로...210만 달러에 재계약
  7. 7작년 ‘빈손’ 롯데, 올해는 황금장갑 낄까
  8. 8“판공비, 회장 취임 전 증액”…이대호 ‘셀프 인상’ 반박
  9. 9신진서, 남해 바둑 슈퍼매치 7전 전승
  10. 10서핑 국가대표 6일까지 선발전
균형발전…초광역 지방정부가 이끈다
김두관 의원 인터뷰
균형발전…초광역 지방정부가 이끈다
하나의 경제체제로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탈산업화시대 연착륙을 위한 필수조건
일몰제가 준 생명 같은 교훈
기고 [전체보기]
공연계 코로나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박흥주
도시철 공익서비스 비용 정부 부담 마땅 /이종국
기자수첩 [전체보기]
국제관광도시 첫 단추 잘 꿰야 /김진룡
무임손실 ‘진짜 원인자’는 정부 /박호걸
김용석 칼럼 [전체보기]
정치적이기엔 너무도 문명적인
신념이 성숙하는 계절, 가을 야구를 사색하며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동래부동헌에 풍악이 울리다
북은 소, 얼후는 구렁이가죽?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가덕신공항 문 대통령이 나설 때 /정유선
인천과 부산, 그리고 관문공항 /송진영
도청도설 [전체보기]
아레시보 전파망원경
전설의 검
문태준 칼럼 [전체보기]
가을의 시간을 맞으며
이주의 시대와 문학
박상현의 끼니 [전체보기]
기장미역과 설치
목포 덕인집 홍어
사설 [전체보기]
2030 부산엑스포 유치전, 전폭적 국가 지원 관건이다
코로나 백신 접종 가시화…물량 확보 등 만전 기해야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원격의료 도입의 조건
경제·복지의 지속가능성과 정치의 역할
이수훈 칼럼 [전체보기]
한반도 비핵화는 어떻게 되나
“미·중 패권 경쟁과 한국”
이은화의 미술여행 [전체보기]
퇴폐미술의 낙인
비극의 주인공이 된 모델
이홍 칼럼 [전체보기]
독성 리더십
젊은 세대에게 찬사를 보낸다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균형발전의 적들
사람은 비용도 기계도 아니다
조영석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연말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즌
가을의 노래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보졸레 와인의 행복
몰도바의 추억
특별기고 [전체보기]
부산 코로나 병상 부족 현실화…생활치료센터 설치 힘 모아야 /고광욱
우리의 희생 기억해준 한국에 감사 /빈센트 커트니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 유콘서트
  • 2020 어린이 극지해양 아카데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