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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세이] 세종과 영실, 통치자와 과학자의 브로맨스 /윤부현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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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2-24 18:57:11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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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가 눈앞에 있는 듯 그려지는 이유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수차례 왕이 바뀌고 전란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기록은 꿋꿋하게 이어졌다. 기록은 기억의 찰나를 잡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것은 한 국가가 될 수도 있고, 개인이 될 수도 있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도 친구에게 마음을 내려놓고 위로를 받고 싶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도 소중한 실록 덕분이다.

대중문화는 역사를 접하는 또 다른 창구다. 대중문화의 대표 격인 영화는 허구다. 허구는 거짓을 뜻하기도 하고, 상상력에 의한 순수 창작물을 말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허구를 실제보다 열등한 복사품으로 취급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허구적 예술이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것을 다루기에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며 중대하다고 말했다. 역사가 일회적이라면 허구는 있을 법한 일의 재현이다.

세종대왕과 장영실을 주제로 한 영화 ‘천문(天問)’이 새해 벽두부터 무한 상상의 문을 열어줬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영감을 받았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그 영감은 세종과 장영실이 발명한 눈부신 과학 기기를 뛰어넘는 어떤 광휘가 되어 관객의 마음을 비춘다. 이 영화는 세종에 초점을 둘 수도 있고, 세계적 과학자 장영실에 대한 연민으로도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다른 방점을 ‘통치자가 과학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과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해 세종을 2009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할 26번째 과학자로 선정했다. 세종의 과학에 관한 관심은 태평성대라 가능했던 취미활동 정도였을까. 15세기 세종이 즉위할 무렵은 ‘격동의 시기’였다. 여진족, 명나라 그리고 왜구가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극심한 가뭄에 허덕이기도 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7년간은 상중에, 세 명의 자식이 요절했고, 50여 가지의 질병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세종은 조선 과학의 꽃을 피웠다. 천문학에 관심이 많던 그는 가뭄과 수재의 해결법을 찾고자 관노인 장영실을 늘 곁에 두고 연구하게 했다. 영화에서는 세종이 친구 영실에게 아픈 마음을 내려놓고 위로받는 인간적 모습을 강조한다. 세종과 영실이 나란히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는 모습, 영실이 먹물과 호롱불만으로 세종에게 우주를 선물한 장면, 그들이 주고받은 절절한 눈물이 적절한 주석이 될 수 있다. 단순히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장영실이라는 ‘과학인’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영화를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공계 기피가 일종의 사조처럼 번지고 있다. 교육부의 개혁안에도 이공계 진학 촉진을 위한 방안은 미미하다. 자꾸 ‘이공계 기피’라고 언론에서 떠드니 관심은 더 줄어든다. 박진감 넘치는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과학기술인의 ‘세상을 바꾸는 흥미진진한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이 IT 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세계시장에서 1등 제품을 가지게 된 데에는 1970·80년대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이공계에 자리를 잡고 연구를 선도했던 덕이 컸다. 정부는 10년 뒤 한국을 먹여 살릴 방책이 뛰어난 이공계 인력에 있음을 깨닫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많은 과학자가 기술 변혁에 발 맞춰 정부의 공무원 채용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우리의 행정고시 격인 일본의 공무원 1종 시험에서는 기술계와 사무계의 선발인원이 비슷하다. 4차 산업혁명의 선제 대응을 국가 발전의 기조로 표방해놓고 ‘문과 출신’만 대거 등용하는 정부가 ‘과학기술자를 우대한다’라고 외쳐댄들 누가 믿겠는가.

역사는 해피엔딩만은 아니다. 수많은 관료와 양반은 천민 출신 영실과 친구로 지내는 세종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영실과 세종의 관계가 소원하도록 끊임없는 모략이 지속되었다. 결국, 세종의 친구 영실은 사건에 휘말려 종적을 감추고, ‘천문’은 문을 닫았다. 집요한 권력 투쟁의 비정한 상황에서 친구의 손을 놓쳐버렸다. 오늘도 세종의 정치 후배들은 또 다른 영실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존중했던 세종이 그립고, 영실이 그립다.

부산대 생명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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