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늦은 가을 어느 날, 특별한 책 한 권이 내 손에 왔다. 번역한 후배가 이렇게 썼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한 ‘레이디’가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한 아름다운 일기입니다. 잠깐의 휴식이 되길.” 여기서 레이디는 이디스 홀든(Edith. B. Holden)이며, 1906년 한 해 동안 자신의 삶터였던 런던의 템스강변에서 그곳 자연을 수채화로 그리고 적은 일기책이었다.
 |
| 그림 서상균 |
첫 장을 넘기니 ‘1월’의 그림은 지저귀는 박새 네 마리로 시작한다. 또 한 장을 넘기니 느릅나무, 참나무, 밤나무의 나뭇잎들이 앙상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2월이 궁금해졌다. ‘2월’의 첫 장에는 ‘2월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이란 애칭처럼 차가운 눈을 뚫고 올라와 꽃을 피우는 설강화들이 수줍게 반긴다. 2월의 일기 곳곳에 마른 가지 위 보송보송한 잔털로 덥힌 움들의 소망이 그려져 있다.
드디어 ‘3월’이다. 쟁기를 끌며 밭을 가는 두 마리 말과 농부 그리고 새끼를 키우는 개똥지빠귀가 눈망울을 초롱거린다. 산사나무 어린 잎과 느릅나무 꽃 그리고 노란 미나리아재비와 보라색 수선화가 반긴다. 3월 일기의 중간 즈음에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초봄에 지은 시(Lines Written in Early Spring)’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운율 같은 여러 갈래의 조화된 가 락을 들었다.
작은 숲속 나무에 기대어 앉아
즐거운 생각들이 마음속의 슬픈 생각을 몰아내는
그 감미로운 기분에 젖어 있는 동안.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작품들에
내 머리를 스쳐 가는 인간의 마음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슬퍼졌다.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달맞이꽃 덤불 사이로
빙카꽃이 화관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모든 꽃들이 마치
숨을 들이켜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다.
내 곁에서 뛰놀고 있는 새들,
그들의 생각을 헤아릴 길이 없다.
하지만 새들은 그들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가슴 두근거리는 행복을 즐기는 듯했다.
산들바람을 붙잡으려고
새싹 움트는 나뭇가지들이 부챗살을 활짝 펼쳤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곳에 즐거움이 있는 게 틀림없다.
이런 마음이 하늘에서 온 것이라면
혹 자연의 성스러운 계획이라면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사를
어찌 내가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혹독한 계절 속에서도,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화단 끝자락에서 노란 산수유가 움을 터뜨렸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꽃망울, 어찌 이렇게 봄의 시작을 동시에 알릴 수 있는지. 경이롭기만 하다. 자연은 그 어떤 겨울을 보내었건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법으로 반응한다.
건물에 갇혀 생활한 지 3주가 되어간다. 자연이 그리워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학교 뒷산으로 나섰다. 세상은 연일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지난주 이따금 내린 비 때문인지 뒷산의 자연은 벌써 여러 초록으로 덮였다. 한 번도 변하지 않아 우중충해져 버린 어두운 초록, 작년 즈음 탄생한 것 같은 조금 밝은 초록, 새로이 시작함을 자랑하는 듯한 연초록까지. 다들 봄맞이로 준비가 한창이다.
중턱 산길과 만나는 숲속 가장자리 앙상하게 마른 가지 끝에 연분홍 진달래들이 달렸다. 회갈색 숲을 배경으로 홀로 핀 모습이 고고함을 넘어 도도하다. 따서 입에 넣어보고 싶은 맘이 굴뚝 같지만, 산을 찾는 모든 이의 것이니 참기로 한다. 쌓인 낙엽 사이로 푸른빛이 감돌고 이름 모들 새싹이 군데군데 자릴 잡았다. 겨우내 춥고 딱딱한 땅 밑에서 냉기를 버텨낸 강인함과 도전정신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잎 모양이 제각각이다. 쪼그려 앉아 아무리 들여다봐도 정체의 실마리가 풀리질 않는다. 하얀 별꽃일까 아님 노루귀? 혹 복수초가 노랗게 피어나길 바라본다. 또 다른 길로 접어드니 여긴 아직 한겨울이다. 툭 치면 부스러질 것 같은 바싹 마른 개망초와 강아지풀이 마법에 걸린 듯 정지된 채 서 있다.
산길에서 멀찍이 떨어진 큰 나무들 아래 늦은 햇살이 내리니 마치 별빛처럼 반짝인다. 머잖아 이곳에 들꽃이 지천에 깔리겠지. 꽃다지가 노란 숲을 이루고 연보라색 얼레지도 한몫하며 숲속 길은 봄의 포만감으로 꽉 채워지겠지.
그러고는 하얗고 노란 꽃들이 경쟁하는 4월과 5월이, 탐스러운 봉오리의 꽃들과 크고 푸른 잎으로 가득 찬 6월과 7월이, 뜨거운 햇살 아래 수많은 곤충이 날고 울어대는 8월과 9월이, 열매가 익고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화려한 10월과 11월이, 또한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하얀 눈으로 설레는 12월과 1월이 찾아오겠지. 115년 전 영국 레이디가 만났던 그 자연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자연에게서 배운다. 언제나 우주 질서에 순응하며 같은 모습으로의 변신에만 집중하는 자연을 통해 깨닫는다. ‘반복의 일상 속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오늘도 자연에게 배운다. 길고 혹독했던 땅속 겨울을 이겨낸 자연을 보며 깨닫는다. ‘스스로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오늘도 자연에게 배운다. 그 어떤 거친 비바람과 추위 속에서도 숲과의 약속을 지키는 자연 속을 걸으며 깨닫는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산 아래 세상의 현실은 너무나 혹독하다.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혼돈에 빠져 있다. 그러나 분명 봄은 올 것이다. 미세먼지와 바이러스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도 분명 봄꽃들은 활짝 필 것이다. 셀 수 없을 수많은 봄의 들꽃이 거무칙칙한 흙과 낙엽더미를 뚫고 툭툭하며 올라와 곧 온 땅에 흐드러지게 피어날 것이다. 그 봄꽃들의 숨결을 맘껏 마실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하며 이리도 힘든 시간을 거뜬히 견뎌내야 하지 않겠는가.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