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강동진 칼럼] 그럼에도 봄은 오고 있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3-05 18:48:50
  •  |   본지 22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지난해 늦은 가을 어느 날, 특별한 책 한 권이 내 손에 왔다. 번역한 후배가 이렇게 썼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한 ‘레이디’가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한 아름다운 일기입니다. 잠깐의 휴식이 되길.” 여기서 레이디는 이디스 홀든(Edith. B. Holden)이며, 1906년 한 해 동안 자신의 삶터였던 런던의 템스강변에서 그곳 자연을 수채화로 그리고 적은 일기책이었다.
그림 서상균
첫 장을 넘기니 ‘1월’의 그림은 지저귀는 박새 네 마리로 시작한다. 또 한 장을 넘기니 느릅나무, 참나무, 밤나무의 나뭇잎들이 앙상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2월이 궁금해졌다. ‘2월’의 첫 장에는 ‘2월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이란 애칭처럼 차가운 눈을 뚫고 올라와 꽃을 피우는 설강화들이 수줍게 반긴다. 2월의 일기 곳곳에 마른 가지 위 보송보송한 잔털로 덥힌 움들의 소망이 그려져 있다.

드디어 ‘3월’이다. 쟁기를 끌며 밭을 가는 두 마리 말과 농부 그리고 새끼를 키우는 개똥지빠귀가 눈망울을 초롱거린다. 산사나무 어린 잎과 느릅나무 꽃 그리고 노란 미나리아재비와 보라색 수선화가 반긴다. 3월 일기의 중간 즈음에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초봄에 지은 시(Lines Written in Early Spring)’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운율 같은 여러 갈래의 조화된 가 락을 들었다.

작은 숲속 나무에 기대어 앉아

즐거운 생각들이 마음속의 슬픈 생각을 몰아내는

그 감미로운 기분에 젖어 있는 동안.

자연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작품들에

내 머리를 스쳐 가는 인간의 마음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슬퍼졌다.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달맞이꽃 덤불 사이로

빙카꽃이 화관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것을 보니 모든 꽃들이 마치

숨을 들이켜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다.

내 곁에서 뛰놀고 있는 새들,

그들의 생각을 헤아릴 길이 없다.

하지만 새들은 그들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가슴 두근거리는 행복을 즐기는 듯했다.

산들바람을 붙잡으려고

새싹 움트는 나뭇가지들이 부챗살을 활짝 펼쳤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곳에 즐거움이 있는 게 틀림없다.

이런 마음이 하늘에서 온 것이라면

혹 자연의 성스러운 계획이라면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사를

어찌 내가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혹독한 계절 속에서도,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화단 끝자락에서 노란 산수유가 움을 터뜨렸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꽃망울, 어찌 이렇게 봄의 시작을 동시에 알릴 수 있는지. 경이롭기만 하다. 자연은 그 어떤 겨울을 보내었건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법으로 반응한다.

건물에 갇혀 생활한 지 3주가 되어간다. 자연이 그리워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학교 뒷산으로 나섰다. 세상은 연일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지난주 이따금 내린 비 때문인지 뒷산의 자연은 벌써 여러 초록으로 덮였다. 한 번도 변하지 않아 우중충해져 버린 어두운 초록, 작년 즈음 탄생한 것 같은 조금 밝은 초록, 새로이 시작함을 자랑하는 듯한 연초록까지. 다들 봄맞이로 준비가 한창이다.

중턱 산길과 만나는 숲속 가장자리 앙상하게 마른 가지 끝에 연분홍 진달래들이 달렸다. 회갈색 숲을 배경으로 홀로 핀 모습이 고고함을 넘어 도도하다. 따서 입에 넣어보고 싶은 맘이 굴뚝 같지만, 산을 찾는 모든 이의 것이니 참기로 한다. 쌓인 낙엽 사이로 푸른빛이 감돌고 이름 모들 새싹이 군데군데 자릴 잡았다. 겨우내 춥고 딱딱한 땅 밑에서 냉기를 버텨낸 강인함과 도전정신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잎 모양이 제각각이다. 쪼그려 앉아 아무리 들여다봐도 정체의 실마리가 풀리질 않는다. 하얀 별꽃일까 아님 노루귀? 혹 복수초가 노랗게 피어나길 바라본다. 또 다른 길로 접어드니 여긴 아직 한겨울이다. 툭 치면 부스러질 것 같은 바싹 마른 개망초와 강아지풀이 마법에 걸린 듯 정지된 채 서 있다.

산길에서 멀찍이 떨어진 큰 나무들 아래 늦은 햇살이 내리니 마치 별빛처럼 반짝인다. 머잖아 이곳에 들꽃이 지천에 깔리겠지. 꽃다지가 노란 숲을 이루고 연보라색 얼레지도 한몫하며 숲속 길은 봄의 포만감으로 꽉 채워지겠지.

그러고는 하얗고 노란 꽃들이 경쟁하는 4월과 5월이, 탐스러운 봉오리의 꽃들과 크고 푸른 잎으로 가득 찬 6월과 7월이, 뜨거운 햇살 아래 수많은 곤충이 날고 울어대는 8월과 9월이, 열매가 익고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화려한 10월과 11월이, 또한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하얀 눈으로 설레는 12월과 1월이 찾아오겠지. 115년 전 영국 레이디가 만났던 그 자연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자연에게서 배운다. 언제나 우주 질서에 순응하며 같은 모습으로의 변신에만 집중하는 자연을 통해 깨닫는다. ‘반복의 일상 속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오늘도 자연에게 배운다. 길고 혹독했던 땅속 겨울을 이겨낸 자연을 보며 깨닫는다. ‘스스로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오늘도 자연에게 배운다. 그 어떤 거친 비바람과 추위 속에서도 숲과의 약속을 지키는 자연 속을 걸으며 깨닫는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산 아래 세상의 현실은 너무나 혹독하다.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혼돈에 빠져 있다. 그러나 분명 봄은 올 것이다. 미세먼지와 바이러스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도 분명 봄꽃들은 활짝 필 것이다. 셀 수 없을 수많은 봄의 들꽃이 거무칙칙한 흙과 낙엽더미를 뚫고 툭툭하며 올라와 곧 온 땅에 흐드러지게 피어날 것이다. 그 봄꽃들의 숨결을 맘껏 마실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하며 이리도 힘든 시간을 거뜬히 견뎌내야 하지 않겠는가.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만조 때면 멈추는 광복지하도 에스컬레이터
  2. 223명 숨진 ‘아리셀 화재참사’ 기업 대표, 징역 4년형 확정(종합)
  3. 3마무리 캠프 코앞인데…롯데 감독·단장 인선 언제쯤
  4. 4‘부캉이’ 추워지기 전 바다로…21일 3차 외해유도(종합)
  5. 5‘좌초 위기’ 해운대 70층 주상복합 개발 기지개 켜나
  6. 6부산시, 신임 기조실장 26일 발표…행정부시장 행안부 고위간부 가닥
  7. 7신공항 공사 컨소시엄 1곳 탈퇴…내달 우선착공 무산 우려(종합)
  8. 8부산에 둥지 수산무역협회…김 등 수출 드라이브
  9. 9‘청문 부적격’ 기관장들 임명 기류…田시장-시의회 협치 두번째 뇌관
  10. 10창원 구산해양단지 컨소 회생 포기…26년 표류 끝 좌초되나
  1. 1‘청문 부적격’ 기관장들 임명 기류…田시장-시의회 협치 두번째 뇌관
  2. 2지광(국제신문 대주주) 만난 부산노동청장 “체임 방치 땐 강력 조치”
  3. 3교육위 국감 화두 ‘교부금 축소’…“교육감 대응도 안일” 질타
  4. 4부산회생법원 국감 “지역언론 가치 고려 국제신문 살펴야”
  5. 5與, 초광역특구법안 발의 “주 52시간 특례 숙의”
  6. 6언론노조·국제 비대위 “대주주 엄벌” 청와대 간다
  7. 7與, 추미애 ‘재정 빨대’ 진화 안간힘인데 기름 부은 부승찬(종합)
  8. 8또 도마 오른 항만공사 통합…“소신없는 사장 책임” 질타
  9. 9[속보] 진영승 합참의장 “北 적반하장 용납 못해…추가 도발 감행시 단호하게 대응”
  10. 10"법령 검토해 결정하겠다"던 김지용 중수청장, 국무회의 참석
  1. 1‘좌초 위기’ 해운대 70층 주상복합 개발 기지개 켜나
  2. 2신공항 공사 컨소시엄 1곳 탈퇴…내달 우선착공 무산 우려(종합)
  3. 3부산에 둥지 수산무역협회…김 등 수출 드라이브
  4. 4송도 바다서 만난 융드립 커피 한 잔
  5. 5가덕 6200억 증액 확약 절실…국회는 특별법 개정안 논의
  6. 6관광과 지역민 함께 성장을…세계가 부산서 묘책 찾는다
  7. 7“친환경 항만 투자 100억 당, 부산 124억 생산유발”
  8. 8동남아 접수하러 ‘부산표 게임’ 방콕행
  9. 9부산은행, 불꽃축제 등 지역축제 발전에 2억 후원
  10. 10예탁원 나눔재단, 17년째 지역상생 실천
  1. 1만조 때면 멈추는 광복지하도 에스컬레이터
  2. 223명 숨진 ‘아리셀 화재참사’ 기업 대표, 징역 4년형 확정(종합)
  3. 3‘부캉이’ 추워지기 전 바다로…21일 3차 외해유도(종합)
  4. 4부산시, 신임 기조실장 26일 발표…행정부시장 행안부 고위간부 가닥
  5. 5창원 구산해양단지 컨소 회생 포기…26년 표류 끝 좌초되나
  6. 6“기존 공부량 유지하며 취약점 공략…남은 주말 수능처럼 모의고사를”
  7. 7APEC공원·금련산역 러너지원공간 문 열어
  8. 8“광안리 해변 보행공간 개선…구 차원 추가 캐시백 검토중”
  9. 9사망사고 1년 만에…부산구치소 수감자 집단폭행 재발
  10. 10피습 자작극 정이한, 모친 증인 신청
  1. 1마무리 캠프 코앞인데…롯데 감독·단장 인선 언제쯤
  2. 231세 데이터 분석가, 최연소 MLB 구단 사장됐다
  3. 3유럽 강호 맞서는 김시우·임성재
  4. 4잘 넣긴 하는데…욱하는 외인, 속 타는 구단
  5. 5전설 수지 수산티 넘은 전설…안세영 47번째 우승 ‘세계新’(종합)
  6. 6KIA 내리 3승이냐, LG 반격 첫 승이냐
  7. 7국대 에이스 곽빈, 최동원상 받는다
  8. 83연승 KIA, LG 꺾고 23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
  9. 9김태형 유임이냐, 이동욱 전 NC 다이노스 감독·조성환 해설위원 등 새 얼굴이냐
  10. 10돈으로 우승은 못 샀다…MLB 월드시리즈 연봉 하위팀 반란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진짜 질문의 시작
AI 시대, 부산 R&D의 대전환
국제칼럼 [전체보기]
원칙이 흔들린 대가
‘빵과 책’·양자경·강말금 그리고
기고 [전체보기]
배의 피부를 지키는 기술은 도장이다
거장은 떠나도, 오케스트라는 남아야 한다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북극항로, 첫 배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배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 당신에게도 닿기를
도청도설 [전체보기]
주당 ‘13.7시간’ 고용
발가벗겨진 사우디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25년을 간직한 리플렛 세 장
요추부 척추관협착증, ‘메포츠’로 극복하기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캉이’ 스펙터클에서 공존으로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사설 [전체보기]
미래대응기금, 지방재정 기반 흔들어선 안 된다
단일종목 ETF 졸속 심사 인정…책임 소재 밝혀야
세상읽기 [전체보기]
문화예술의 시대
다민족 사회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두 미술관, 각자의 역할을 묻다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복지의 ‘필요 원칙’과 포퓰리즘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한국이 가진 자산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사람은 갔어도 명당은 남아 있다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청년 떠나는 지방, 수도권 인구 분산해야
거울 속의 외계인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