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5년 서울에 홍역이 크게 번져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상중에 있던 이헌길(李獻吉)은 그때 마침 서울에 있었다. 볼일을 보고 성문을 나서는 참이었다. 수레에 실린 관(棺)과 지게에 얹힌 시신이 줄줄이 앞을 지나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100여 명이 되었다. “내가 저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 상중이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떠나는 것은 어진 마음이 아니지.” 그는 발길을 돌려 서울 시내 친척 집에 머무르며 의술을 펼쳤다.
이헌길로부터 치료와 처방을 받은 사람들은 증세가 완화되었고 이내 병이 나았다. 열흘이 지나자 병고(病苦)를 호소하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거리를 메웠다. 행세깨나 하는 사람은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은 해가 져서야 겨우 이헌길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그래도 한마디 처방이라도 얻어 가면 효험을 보았다. 이런 까닭에 워낙 사람이 많이 몰려들어 그가 길을 나서면 에워싼 사람이 흡사 벌 떼가 뭉쳐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멀리서도 그것을 보고 이헌길이 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아닌가.
상중에 있으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 이헌길의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이타심의 지극한 발로다. 하지만 위급할 때 사익을 챙기는 사람도 나오는 법이다. 이헌길은 악소배(惡少輩)의 꼬임에 빠져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후미진 곳으로 종적을 감추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의 의술로 돈을 벌어보려는 자들의 수작에 걸려들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내 소재처가 알려지고 환자가 몰려들자, 이헌길은 따뜻한 말로 사과하고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 돈벌이와 상관없는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료가 다시 시작되자 환자가 밀려들었다. 이헌길 혼자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환자를 직접 볼 수 없는 경우에는 하는 수 없이 병증에 따른 처방을 입으로 불러 주었고 사람들은 그 처방으로 병을 이길 수 있었다.
이헌길의 의로운 의술은 다산 정약용이 쓴 ‘몽수전(蒙叟傳)’에 나온다[몽수는 이헌길의 자(字)다]. ‘몽수전’에 따르면 그는 정종(定宗)의 후손이지만, 윗대에 서자(庶子)가 있었던 듯 벼슬길에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그는 대신 의술을 파고들었다. 특히 홍역 치료법을 연구하여 ‘마진기방(麻疹奇方)’이란 의서를 쓰기도 하였다.
다산은 어렸을 때 홍역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이헌길의 치료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이헌길의 은혜를 갚고자 ‘마진기방’을 다시 깊이 검토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이란 저술로 발전시킨다. 곧 ‘마과회통’이라는 의학사(醫學史)의 명저는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다산은 ‘마과회통’의 서문에서 송나라의 명신 범중엄(范仲淹)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퍽이나 곱씹어 볼 만하다.
범중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글을 읽고 도(道)를 배워 천하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한다. 만약 이 길을 걸을 수 없다면, 황제(黃帝, 중국 의학의 창시자)의 의서(醫書)를 깊이 공부하고자 한다. 이 역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범중엄의 이 말은 의료의 본질적 성격을 꿰뚫는다. 의료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지극히 이타적인 행위다.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사회가 얼어붙고 있다. 하지만 질병관리본부와 의사, 간호사 등의 의료인, 자원봉사자, 관계 공무원들이 바이러스에 맞서 분투하고 있다. 이헌길·다산과 다를 바 없는 이타적 심성을 실천에 옮기신 분들이다. 이분들의 노력과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 모두 상호부조의 마음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었으면 한다.
사족. 다산은 1801년 신유옥사(辛酉獄事)로 장기(지금의 포항)로 유배되었을 때 시골 사람들이 변변한 의술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촌병혹치(村病或治)’란 책을 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을 중심으로 만든 간단한 의서다. 귀양살이가 억울하고 답답했을 터인데 시골 사람들의 건강을 걱정하여 의서를 쓰다니 과연 다산이라 하겠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