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국회 총선(1948년 5월 10일)은 한국 최초의 선거로, 의원 200명을 뽑았다. 그 중 무소속이 42.5%인 85명을 차지해 원내 제1 정당보다 30석이나 많았다. 그 시절 정당제도에 대한 이해가 낮은 데다 후보 개인의 인기가 선거를 좌우했던 까닭이다. 2년 뒤 열린 2대 총선에서는 그보다 더했다. 총 204석 가운데 무소속 당선인이 무려 124명으로 절반을 넘었다. 그중 경남이 26명으로 전국 최다였다. 결과적으로 무소속 출마가 당선의 보증수표 격이었던 셈이다.
박정희 군부정권 아래의 6대 총선(1963년)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아예 사라졌다. 집권세력이 정당정치를 내세우며 출마 자격을 정당 소속으로만 제한했기 때문이다. 이런 규제는 1971년 8대 총선 때까지 이어지다가 박정희 유신체제의 9대 총선(1973년)부터는 무소속 후보 출마가 다시 허용되었다. 당시 무소속 당선은 19명이었다. 이후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 추세와 그 명암은 정국 상황이나 주요 정당의 공천 파열음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짙었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2004년 총선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에 대한 역풍이 몰아쳤던 때다. 선거 결과 여당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첫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무소속은 역대 최소(2명) 당선에 그쳤다. 반면 그 다음 18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후보 당선이 부산 5명을 포함해 25명으로 치솟았다. 이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계 의원들이 대거 무소속으로 출마한 영향이 컸다. YS(김영삼) 집권기인 1996년 총선 때도 공천 후유증 등으로 무소속 후보가 봇물을 이뤘다. 부산 23명 등 전국 394명을 기록해 9대 총선 이래 최다 규모였다. 심지어 부산 서구에서는 무소속이 5명으로 정당 후보 4명을 웃도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이번 21대 총선에서도 무소속 바람이 일어날 조짐이다. 최근 여야 공천에서 미끄러진 정치인들의 출마 채비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게다가 PK(부산 울산 경남)지역에서는 미래통합당 공천에 불복한 현역 의원 등의 집단 행동과 무소속 연대 움직임마저 나타나는 형국이다. 그러니 선거의 주요 변수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무소속 출마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고, 불가피한 면도 있을 터다. 하지만 대의제 의회정치와 정당 책임정치라는 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다수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면 정당에 원대복귀할 것을 공언하고, 실제로 그렇게 돼 왔으니 더 그렇다. 아무튼 선택은 유권자의 몫이니 결과는 지켜볼 일이다.
구시영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