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사회와 거리를 두는 ‘고독한 전투’가 우리 삶터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필자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에서 일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었다. 최전선에서 코로나19와 대치하는 이들을 도와줄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다 일상이 지겨워 드라마 ‘킹덤’ 1화를 봤다. 기쁨도 잠시 필자는 ‘현실 도피’에 실패했고, 어떠한 생각에 잠겼다.
‘킹덤’ 1화는 코로나19로 골머리를 앓는 국가들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이념주의’와 ‘실리주의’의 방법을 놓고 질기게 고민하는 여러 국가의 모습이 몇 장면에서 은유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극 중 배두나는 생사를 오가는 환자들을 도덕적인 방법으로 살리는 인물이고, 다른 한 인물은 ‘살 수만 있다면’ 반인간적인 방법도 택하는 실리주의자다. 국면을 암시하는 서사는 바로 이것이다. 굴뚝에서 한동안 뜸했던 연기가 피어오르고, 굶주린 환자들은 ‘고기 죽’을 정신없이 해치운다. 이 죽은 차갑게 식은 사람의 살로 만든 것이었다. ‘삶’을 위해 환자들을 속이고 인육을 먹인 실리주의자. 그의 목적은 더할 나위 없이 위대했지만, 1화 결말은 그의 행위를 명쾌히 ‘오답’이라 말한다. 그의 방법이 틀렸기에 필자도 작가가 내린 결말에 손을 들어줬다.
주간지 ‘시사IN’으로 중국의 코로나19 퇴치 방법을 접했다. 우한과 후베이성 지역을 봉쇄했으며, 건강 상태를 적은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사람은 관리자의 독촉에 시달린다고 한다. 또한, 중국의 한 학교에서는 코로나19로 제정된 규정을 준수하지 않은 학생을 공개적으로 비판한단다. 그들의 획일적인 명령과 단합은 국가의 이념을 확실하게 따르는 행위다. 민주주의가 이념인 국가에서 성장한 필자에게 중국의 이러한 방식은 새롭고 무서웠다. 개인의 생각과 판단이 표현될 창구와 존중받을 수 있는 절차가 중국에는 없는 것이다. 감염자 발생을 막는다는, 공동체 이익을 중시하는 명목하에, 개인의 모든 자유를 국가 정부가 관리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코로나19로 나타난 정부의 동태와 활동하는 주체들의 자발성 여부가 중국과 상당히 다르다. 이 점이 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는 이유일 것이다. 발병 경로를 신속히 제공하고 앞으로 대응책과 지금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한국 질병 관련 기관과 정부 그리고 나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자 마스크를 쓰고 동틀 무렵부터 일하는 자영업자들. 코로나19 전담 병원 파견에 자발적으로 지원해 사명감 하나로 버티는 의료인들. 현장에서 감염 위기에 노출된 채 일하는 선별검사소 직원들. 이외에도 마스크를 쓰거나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는 사람들. 행동 양상은 다르지만, 희생의 무게를 잴 수 없듯 우리는 코로나19 앞에서 민주주의 이념을 지켜내며 움직이고 있다.
내 옆에 있는 이를 감염에서 지키며 ‘존중’을 몸소 실현하고 있는 우리의 방법은 민주주의의 시발점이자 도착지라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를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리는 일은 어렵다. 그렇지만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느낄 수 있도록 국가 구성원이 함께 노력하는 과정’으로 거시적이게나마 민주주의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 목표는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번민하고 연대하는 과정. 이것이 우리가 움직이는 동력이자 목표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위하는 일 말이다.
필자는 F.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이 구절이 참 좋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어느 이의 처절한 몸부림과 그 고통의 모양은 다르니, 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구절을 해석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 있는 이들은 자발적인 희생과 버팀 그리고 연대를 통해 대한민국의 이념을 지켜내고 있다. 비록 머나먼 여정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이념으로 선택한 방법과 결정이라면, 희생의 고통을 조금씩 나누다 보면, 따뜻한 봄날을 되찾을 것이다.
부산대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