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게 그러니까 언제 시작이 됐는지도, 언제 자취를 감췄는지도 모르는 까닭에 그냥 예전에. 김해 토박이 어르신들 사이에는 ‘정구지계(契)’라는 게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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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촌하고도 안 농갈라 묵는다’는 아시정구지 무침. |
계(契)라고 하니까 부추(정구지)를 재배하는 사람들끼리의 협업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닙니다. 초봄이 되면 자연에서 재배되는 정구지가 나기 시작합니다. 첫물 또는 초벌을 경상도 사투리로 ‘아시’라고 합니다. 자연의 시간이란 게 묘해, 같은 김해라도 아시정구지가 나는 시기가 조금씩 다릅니다. 한림, 주촌, 진례, 대저, 장유 등등 동네마다 약간 시차를 두고 아시정구지가 수확되었다고 합니다. 계원들은 아시정구지가 나오는 때를 경험으로 압니다. 그럼 돼지고기 몇 근 삶고, 막걸리 몇 말 지고 정구지 밭으로 향합니다. 밭에서 바로 뽑아 간단한 양념으로 정구지를 무칩니다. 그걸 돼지고기 수육에 곁들여 막걸리와 함께 먹습니다. 이런 식으로 며칠 간격으로 김해를 한 바퀴 돕니다. 그렇게 봄을 맞고, 그렇게 봄을 즐겼다고 합니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풍류가 아니겠습니까.
정구지계가 단순히 호사가들의 풍류에 그쳤다면 솔깃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시정구지가 날 때를 맞춰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됩니다. 정구지계에는 지역 유지들이 십시일반 해서 농번기를 앞둔 농민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겨우내 생명을 보듬고 있다 봄기운을 머금고 자란 정구지에, 내 동네에서 얻은 돼지고기와 내 동네에서 빚은 막걸리만 한 궁합이 또 있을까요? 더군다나 아시정구지는 말입니다. ‘사촌하고도 안 농갈라 묵는다’ ‘아시정구지는 사위 안 주고 서방 준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맛과 효능이 각별하다고 합니다.
모르면 몰랐지,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김해에 정구지계의 전통이 남아 있는지 수소문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전통이, 이렇게 기막힌 풍류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몇몇이 작당을 했습니다. 어느 해 봄, 김해에서 ‘정구지계’를 한번 부활시켜 보기로 했습니다.
김해 곳곳에서 부추가 나고 부추작목반도 있지만, 한림면에서 나는 노지 정구지를 최고로 친다고 합니다. 한림면 농가를 수소문해 아시정구지를 넉넉히 뽑아 왔습니다. 거기에 갓 삶은 돼지고기 수육을 곁들였습니다. 정구지가 거기서 거기지 했다가 한방 크게 얻어맞았습니다. 아삭하되 질겅거리지 않는 식감, 대지의 향을 옴팡지게 쓸어 담은 듯 강렬한 향, 게다가 어지간한 고추냉이에 견줘도 좋을 알싸한 매운맛이 일품이었습니다. 기분 좋은 향과 매운맛이 어찌나 오래가던지 종일 봄기운에 취해 있었습니다.
제게 정구지계 이야기를 전해주고 아시정구지 맛을 알게 해줬던 이는 서면 어느 골목에서 ‘바보주막’을 운영했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강희철 대표님입니다.
“희철 선배, 어떻게 아시정구지에 막걸리 한 사발 하셨는지요?” 다시금 봄입니다.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