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우리의 보통날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건 지난달 20일부터다. 이날 경북 청도대남병원에서 첫 사망자가 나왔다. 대구·경북에서만 51명이 감염 판정을 받았다. 전국 확진자는 순식간에 100명을 넘었다. 대구·경북을 진앙으로 한 국내 팬데믹은 그렇게 시작됐다.
공포로 가득한 수천만 눈초리가 화살처럼 청도대남병원을 쏘아보던 그날, 경북 청도에 있었다. 큰어머니 시신은 사정이 있어 청도대남병원에 잠시 머물렀다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대구과학수사연구소를 거쳐 청도의 한 장례식장에 안치됐다. 코로나19와는 관계없는, 사람 좋은 시골 할머니에게 닥친 비통한 절명이었다.
고민 끝에 이틀 밤을 새울 요량으로 짐을 쌌다. 사람의 도리는 해야 했다. 마스크를 쓰고, 차를 몰았다. 빈소는 고요하고 쓸쓸했다. 친족 외 찾는 이도 없었다. 슬픔만 무겁게 깔렸다. 난리가 벌어진 한가운데 빈소를 차릴 수밖에 없었던 상주는 말이 없다. 죄인처럼 문상객을 맞았다. 조문을 위해 마스크를 벗으려 했다. 마스크로 향하는 손을 사촌 형이 붙잡았다. 상주의 눈은 입을 대신해 말했다. “그리 애쓰지 않아도 된다.” 조문이 끝나자마자 상주가 등을 떼밀었다. “괜히 네가 곤란해진다. 어머니도 다 이해하실 거다.” 황망하게 빈소를 빠져나왔다. 씁쓸하고 낯설었다.
소문은 바이러스보다 빨랐다. 또 바이러스처럼 ‘변종’을 낳았다. 빈소엔 청도대남병원을 방문했거나, 코로나19 확진자 동선과 겹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청도를 다녀온 하루 뒤 ‘청도대남병원에 갔다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낙인이 찍혔다. 걱정을 핑계로 감염 사실을 확인하려는 연락이 제법 왔다. 어디에도 나갈 수 없었다. 휴가를 내고 스스로 격리했다.
자가 격리 기간 모든 끼니는 배달 음식으로 해결했다. 자잘한 생필품도 클릭 몇 번으로 채웠다. 대문엔 ‘수고 많으십니다. 문 앞에 그냥 놓고 가주세요’라고 쓴 쪽지를 붙였다. 사회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은 꽤 오래 계속됐다. 이런 낯선 상황은 평소 익숙했던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게 했다.
사회와 멀어진 거리는 플랫폼 노동자가 대신 이어줬다. 발광하는 바이러스를 박멸하려 비워둔 공간에서, 그들은 타인의 생존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사무실에 다닥다닥 붙어 일하면서, 역설적으로 고객의 사회적 거리를 지켜준 콜센터 노동자도 있다. 바이러스는 이처럼 사회적 거리 사이에 낀 약자를 잔인하게 공격했다. 이들은 살인적 노동에 죽음을 맞거나, 바이러스에 집단 감염됐다.
하루라도 폐지를 줍지 않으면 물 한 병, 빵 한 조각 사 먹기 어려운 빈곤 어르신들도 사회적 거리 사이로 불려 나온다. 무료급식소에서 나눠주던 밥도 끊긴 지 오래다. 바이러스는 최후방 복지마저 집어삼켰다. 이들에게 사회적 거리의 품격 따위는 없다. 난민 신청자와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는 자신을 지킬 ‘자격’도 박탈당했다. 사회는 이들에게 제공할 마스크를 준비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사회적 거리를 위해 시행된 개학 연기는 비정규직 강사의 열악한 처지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드러냈다. ‘긴급 돌봄’으로는 도저히 육아의 빈자리를 메울 수 없는 노동자도 많다. 며칠의 무급 휴업으로 생계가 막막해진 일용직 가장도 셀 수 없다.
익숙했던 것이 낯설어지기 시작하고서야 약자의 삶이 보인다. 바이러스마저 빈부와 지위를 차별하는 놀라운 사실도 깨닫는다. 재난이 이들 약자의 삶을 세상에 들춰내기 전까지, 누군가에겐 그저 익숙한 일상으로 여겨졌던 상황일 테다.
아무튼, 국난 극복이 특기인 우리 국민은 이 지독한 바이러스를 결국 이겨낼 거다. 지긋지긋한 마스크를 벗을 날도 올 거다. 그러면 이 낯설어진 풍경이 또다시 익숙하고 예사로워질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마스크를 벗기 전에 이들 약자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봐야겠다. 다시 돌아갈 일상이 예전과 똑같다면, 재난 끝에 얻을 성찰도 없다.
기획탐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