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온 ‘김육 평전-대동법을 완성한 조선 최고의 개혁가’(이헌창 지음·민음사)에서 읽은 대목이다. “(조선 시대) 정책의 성공을 증명하는 사실은 인민이 ‘그것을 편(便)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용어(便民·安民·利民)가 887번 나온다. ‘인민이 모두 그것을 편하게 여긴다(民皆便之)’는 14번 나온다. ‘인민이 그것을 몹시 편하게 여긴다(民甚便之)는 27번 나온다.”(625쪽)
그러나 그렇게 정책·시책을 펴는 것은 어려웠다. 개혁 군주 정조가 벼슬아치들을 놓고 이렇게 한탄한다. “오늘날 풍토는 자기만 알고 국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심지어 재정을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안정하는 기술을 쓸데없다고 여기기까지 하니, 이래서야 국가가 무엇을 믿겠는가.”(536쪽·정조실록 20년 10월 22일 자)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정조는 김육 등을 계승하는 자세를 신하에게 주문했다.”
‘대동법을 완성한 조선 최고의 개혁가’ 김육(1580~1658)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김육은 ‘재산루기’에서 ‘무릇 천하의 일은 실질일 따름이다. 명분은 실질에서 나오고 실사(實事)는 명분에 근본을 두니, 실사가 없으면서 명분만 찾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명분에 치중하는 주자학자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았다.”( 553쪽)
조선 후기 역사를 더듬다 보면 오늘날 시선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혁신의 관점에서는 안타깝거나 화가 나며, ‘백성의 삶을 개선한다’는 실질의 기준으로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참 많다. 당장, 당쟁사만 봐도 그렇다. 수많은 논쟁, 처벌, 처형, 실각, 환국이 당쟁을 매개로 펼쳐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많은 당쟁 가운데 백성 삶을 개선하거나 나라 살림을 더 잘 가꾸는 ‘실질’과 직접 관련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 거의 노론 주도의 ‘명분’ 싸움이다. 보편타당한 원리임을 내세우지만, 뜯어보면 당파성 농후한 관념론인 주자학·성리학의 명분 투쟁이다.
조선 후기,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훌륭한 학자·관리로 활동한 유수원(1694~1755)은 당시 산림(노론)을 매섭게 비판했다. “사대부들이 조금만 글을 쓸 줄 알면 바로 도학을 논하는 말을 구사하여, 외면으로 보면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로 몸과 마음에서 체험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 껍데기만 주워 모아 형식만 꾸며 놓고서 스스로 기뻐한 것이니, 명성이 아무리 높을지언정 실제에서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640쪽) 껍데기란 얘기다. 국난 타개·국민 복지를 위한 ‘실제’에서는 아무 쓸모 없었다는 얘기다. 공자·맹자 공부를 잘못했거나 안 했다는 거다. ‘유교 탈레반’이란 요즘 신조어가 그냥 나왔겠는가.
이런 풍토에서 조선 중·후기 김육은 눈부신 존재다. 서인 계열로 ‘메이저’에 속했고 최고위직인 영의정에 올랐던 그는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았다. 여러 정파와 대화·타협하고 강한 추진력도 발휘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해 ‘실질’ 있는 정책을 평생 설계·제안·추진했다. 백성의 극심한 고통과 부담을 덜어준 대동법을 충청·전라로 확대하고 실질적으로 ‘완성’했다. 청나라에 세 번 사신으로 다녀온 견문으로 새 역법인 시헌력을 시행해 사회 시스템을 개선하고 동전 통용 정책을 집요하게 밀어붙여 경제 시스템을 정비했다.
이런 ‘핵통쾌 사이다 발언’도 했다. “삼남에는 부호가 많습니다. 이 법(대동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가가 영(令)을 시행하는 데 마땅히 소민(서민)의 바람을 따랴야 합니다. 부호를 꺼려 백성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멋진 정치인이자 관료인 김육과 함께 지금 우리 사회가 꼭 재조명·재발굴해야 할 옛 인물로 동래부사를 지낸 조엄(1719~1777)도 있다. 447명 조선통신사를 이끌고 9개월에 걸친 일본 방문을 잘 마치고, 오는 길에 고구마를 조선에 들여와 백성의 배고픔을 덜었다. 그밖에도 ‘문약(文弱)’의 길로 접어들면서 실질을 잃고, 백성의 삶도 나라의 안녕도 위태로워지던 시기에 조엄이 보여준 높은 안목, 실력, 활약은 실로 빛난다. 조엄을 재발견해야 한다.
김육과 조엄 재발견을 강조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코로나19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 때, 헛된 명분을 내걸고 정파 이익만 챙기되 실질에 아무 도움도 안 되면서 국민에게 증오와 분열만 주는 자와 실제 헌신하고 돕는 이를 잘 구분할 수 있다. 김육 조엄처럼 제대로 이바지하는 사람은 잘 ‘발견’되지 않는 어려움은 있다. 그들이 맡은 영역은 원활히 돌아가니 눈에 안 띄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작정 ‘튀어보려고’ 분열시키고 일부러 사고 치는 자(세력)는 주목받는다. 역설이다. 이런 구조를 개선할 수 없을까? 국민 지혜가 필요하다. 곧 총선이다.
편집국 부국장 겸 인문연구소장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