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당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썼던 소설이 책으로 나와 집으로 배송되었다….
아버지는 지난 3월의 어느 봄날 아침, 마치 양초가 모든 심지를 다 쓰고 꺼지듯 그렇게 떠나가셨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지가 18년째. 요양병원에 계신 것만 거의 6년에다 의식이 없이 누워계신 것만 석 달이 다 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상스러울 만치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꽤 덤덤한 편이었다. 새벽 일찍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도, 임종을 보지 못하고 장례차에서 얼굴을 확인했을 때도, 입관할 때 마지막으로 손을 잡고 얼굴을 덮을 때도 나는 덤덤하기만 했다.
그런데 오후 4시쯤 되었을 때 나는 잠시 멍한 상태를 겪어야 했다. 경황이 없어 확인하지 못한 문자를 체크하던 도중의 일이었다.
‘배길남 작가님 반갑습니다. ○○택배입니다. 고객님이 기다리시던 도서가 도착되었습니다’.
문자를 읽자마자 느낌이 묘했다. 그건 예감이라기보다 직감이었다. 순간 메시지 하나가 또 날아왔다.
‘오늘 소설 무크지 ‘사현금 2호-꽃중에 꽃’ 저자 증정본 20권 도착 예정입니다’.
선배 소설가분이 보낸 문자였다. 나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겪었던 여순항쟁의 아픈 기억을 소설로 써서 이 책에 참여했다. 말이 아버지의 아픈 기억이지 가족사를 소설로 쓴다는 것은 뼈를 깎는 듯 고통스럽기만 했다. 슬픈 역사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던 탓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소설이 실린 책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당신의 죽음과 맞바꾸듯 집으로 배송되어 오다니…. 하느님이 악취미를 가지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아이러니한 상황을 선사해주실지는 꿈에도 상상치 못한 것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울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가슴 한 구석의 구멍이 제법 커졌다는 건 사실이었다. 바람이 휘휘 통할 만치.
그 책은 결국 아버지와 만나지 못했다. 책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입관이 끝난 시점이기도 했지만, 상식을 올리고 발인을 하고 화장을 하고 세상에 뿌려드리는 의식을 행하면서도 나는 굳이 책을 가져와 아버지께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훨훨 날아가시며 세상 일은 훤히 꿰뚫어 보실 것 아닌가? 못난 아들놈이 생전에 잘해드린 게 뭐가 있다고…. 책에 실린 소설 하나 가지고 생색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런 불효를 해야 가슴에 뚫린 구멍을 통해 당신이 겪은 슬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있었다. 큰 재주 없는 삼류 글쟁이지만 그런 사명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글을 쓰는 새벽이 4월 3일의 새벽이다. 1948년 제주의 4·3은 여수, 순천의 10월 19일로 연결되고 일곱 살 아버지의 외딴섬 거문도까지 피바람을 몰고 왔었다.
아버지는 그때의 일로 돌아가신 형님 두 분을 정확하게 기억하셨다. 다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제 당신은 내 소설을 읽지 않으셔도, 내 설명을 듣지 않으셔도, 그때의 일과 그때의 가해자들에 대해 훤히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아버지는 멀리 떠나셨다. 남은 건 아버지가 남긴 이야기들뿐. 가슴의 구멍이 더 커질 것을 알지만 하나하나 받아 적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이제 일주일. 아직 난 덤덤하다. 당신을 화장할 때 빼고는 크게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 하지만 구멍은 자꾸 커지는 것 같다. 며칠 전 반찬으로 나온 양념게장을 먹다 또 한 번 멍해졌었다. 혀가 녹을 듯이 기찬 양념게장을 만들 줄 알던 아버지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보내드린다는 것은 결국 이런 일들의 연속일 것이다. 이제 또 무엇이 가슴을 파먹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 덤덤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