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주 전부터 늦은 오전 즈음에 “오늘 아침의 까치 특종입니다”라는 동영상이 가족톡에 자주 올라온다. 아내가 부엌 창을 통해 보이는 둥지에 드나드는 까치를 촬영한 영상이다. 아내는 갑자기 까치 전문가가 되어버렸다. 까치가 3, 4월께 5~8개 알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부엌 창에서 불과 2m쯤 떨어진 둥지 안에 있을 알들에 대한 상상이 아내의 일상 중 한 부분이 되었다.
집 떠난 지 7년 만에 강제로 봄을 함께 보내고 있는 둘째 딸도 덩달아 난리다. 깍깍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초긴장하며 휴대전화를 집어든다. 둥지 안 소식이 궁금해 망원경을 사자는 얘기까지 등장했다. 두 사람은 오늘도 새끼 까치들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특종을 찍겠다는 야망(?)에 불타며 산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사회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오히려 가족 간 거리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알콩달콩을 넘어 너무 가까워져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하기 일쑤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미치지 못했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또한 전혀 기대치 못했던 일의 해결이 진행되기도 한다. 끝을 종잡을 수 없던 중동과 아프리카의 내전이 중단되고, 봄이면 우릴 암울하게 했던 황사와 미세먼지가 쑥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한다 해도 해외여행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모든 이에게 똑같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마스크 두 장일 수 있음과 바이러스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할 수밖에 없음과, 또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도 알게 되었다. 일상에서 항상 쉽게 가지거나 누리며 당연히 여겼던 것들에 대한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다.
전 세계 사망자가 10만 명에 다다랐다. 문제는 이 숫자의 끝을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앞서 간 문명을 자랑하고 고도로 발달한 의료기술을 내세우건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감에도 허둥대고 있는 전 지구의 실상 앞에서 지나온 시간을 곰곰이 되짚어 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지? 뭐가 문제였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틀렸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나? 다음 세대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대처법이 쉽게 떠오르질 않는다. 동시다발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일자리와 기울어지는 경제, 황폐해지고 삭막해져 가는 사회와 맘대로 이동할 수 없는 고립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세상을 보니, 앞만 보고 급하게 달려오며 잃어버리고 놓치고 또 스스로 버렸던 것을 다시 기억해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할 듯싶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벌려 놓은 ‘깊고 넓은 간극 되메우기’는 우리 사회의 아니, 전 인류의 영원한 숙제가 될 것 같다.
왜 이러한 고통의 시간이 허락되었을까? 왜 그리도 자랑하던 의료기술과 선진 시스템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굴욕의 시간이 전 세계인에게 허락됐을까?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분명 이 시간 속에는 뭔지 모를 큰 의미가 내포된 것 같다. 바이러스 창궐이 지나간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전처럼 그대로 살아가기에는 이 시간이 너무나 아깝고 억울하다. 코로나로 갑작스레 생을 마친 수많은 사람과 사라진 일터 앞에서 좌절하는 셀 수 없는 사람들 때문이라도.
학생들을 컴퓨터로 만난 지 벌써 4주를 지나고 있다. 놀랍도록 발달한 IT기술에 찬사를 보내다가도 어쩌면 반년 넘도록 학생들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내 한숨이 나온다. 이 삶이 그토록 바라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결과인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ICT 시대의 지향점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조금은 불편했지만 불만이 크게 없었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맘이 간절해진다.
며칠 전, 그림동화 ‘구름빵’을 샀다. 지난 사월 첫날, 백희나 작가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ALMA)’ 수상 소식을 접하곤 언젠가부터 미뤄왔던 ‘구름빵’ 사기와 읽기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구름으로 만든 빵을 소재로 한 가족 이야기인 이 그림동화에는 아이들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배고픔을 뒤로하고 출근을 위해 바삐 뛰어나간 아빠를 위해 구름빵을 들고 비 오는 하늘을 날아오른 두 아이의 아빠를 향한 간절한 눈망울과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창문으로 전해진 구름빵을 받아든 아빠의 그렁그렁해진 안경 속 눈동자가 떠오른다.
아빠 손을 잡고 다시 날아올라 지각하지 않은 아빠를 창문 밖서 바라보며 “후유, 다행이다”를 외치는 두 아이의 마음을 보며, 유아가 주 고객인 그림동화인데 왜 내가 맘이 몽글몽글해지고 또 왜 그리 미안한 맘이 자꾸 들던지.
이월 중순에 시작된 두 달여의 긴 터널 속에서 놓쳤던 것, 잊고 있던 것, 소홀히 생각했던 것을 적어 본다. 또 새로이 공감하며 배운 것을 적어 본다. ‘남의 문제가 나와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음’ ‘미래를 위한 준비와 선투자의 중요함’ ‘허구와 허상의 처참한 결말’ ‘자기 것을 스스로 내어놓는 자원봉사와 자기희생의 가치’ ‘물질을 뛰어넘는 사랑과 배려의 힘’ ‘공공보건의 필요성과 시대역할’ ‘모두가 함께하는 인내와 절제의 소중함’ ‘당장이 아닌 다음과 다음 세대를 위해 살아가야 함’ 등.
그동안 최고이자 최선으로 여기며, 당연한 목표로 잡았던 많은 것에 대한 판단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그 어떤 국가정책이나 강한 권력과 힘으로도 해내지 못했던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공존에 대한 큰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모두가 서로 돕고 나누며 연대하지 않는다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도.
바이러스가 벌려 놓고 있는 이 간극을 어떻게 메워가야 할까? 무엇으로 다시 메우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까? 지금 겪고 있는 수개월의 고통이 수년 아니 수십 년 미래 도약의 근거가 되고, 우리 사회의 여러 고질병 치료의 백신이 될 수 있다면, 또한 이름 모를 바이러스가 다시 찾아왔을 때 지금보다는 능숙하게 지금보다는 희생 없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만 선다면, 나는 이 긴 고통의 시간을 기꺼이 감내하리라.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