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우편함을 살폈더니 선거 공보물이 담겨 있다. 총선이 코앞에 다가왔음이 새삼 느껴진다. 인쇄물량이 꽤 되는지 묵직하다. 다 읽어 보려니 피곤할 듯해 그냥 한쪽으로 밀어두려 했다. 게다가 출마자 언사라는 것은 대개 비슷비슷해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던가. 근데 한편으로는 이건 유권자의 예의가 아니다는 ‘아주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만드느라 적잖이 고생했을 터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한번 훑어나 보자 싶었다.
봉투를 열고 나서야 우리나라에 정당이 이렇게 많다는데 우선 놀랐다. 비례대표 투표용지 길이가 48.1㎝로 역대 선거 가운데 가장 길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이 정도 인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하긴 비례대표 선거에 35개 정당이 뛰어들었다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작정하고 공보물을 탐독하니 뜻밖에 나름 재미가 있었다. 출마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궁금증이 조금은 해소됐다. 각 당의 공약 비교도 흥미로웠다. 어떤 당은 목표 의석을 얻으면 국민 개개인에 큰 액수의 돈을 지원한다고 한다. 또 다른 당들은 변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 추구와 디지털 성폭력 근절 등을 약속한다. 말의 성찬일 수 있겠으나 일단은 듣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하지만 눈을 현실의 정치판으로 돌려보자. 공보물에서 내걸었던 공약이 표심을 잡기 위한 미끼였음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기껏 느꼈던 포만감이 어느 사이 짜증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상대 정당이나 인물을 향한 수준 이하의 공격이 난무하고 거짓말이 판을 치고 있어서다. 출마자들의 입에서는 걸러지지 않은 말이 잇달아 쏟아져 나온다. 어떻게든 당선되겠다는 욕망만 가득할 뿐 유권자의 심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시적 사탕발림으로 민심을 끌어올 수 있다는 오만방자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국민은 그들이 생각하는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이제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런데도 유독 정치권만 애써 이를 외면한다. 남모를 소신에서 비롯됐는지 아니면 ‘대중은 여전히 우매한 존재’라는 낡은 틀에 갇힌 까닭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무지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정치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요즘처럼 대한민국 국민에 대해 경외감을 가진 적은 별로 없었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시기를 맞아 우리 사회 구성원이 보여주는 ‘거대한 힘’을 하루가 멀다 하고 지켜보는 까닭이다. 선진국이라던 서구 국가들이 코로나19에 속절없이 무너질 때 우리는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민관의 노력 덕분에 확진자 숫자는 전 세계 국가와 견줘 눈에 띌 정도로 적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묵묵히 제 일을 다하는 ‘숨은 영웅’의 모습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몇 겹의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채 감염병과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 없는 살림쪼개 기부하는 이들, 온갖 불편을 참으면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는 장심이사는 모두가 애국자이다. 어떻게든 지금의 위기를 넘겨야 한다는 공감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려움에 처할수록 대한민국의 진정한 국민성이 드러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뒷받침해 주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15일 총선은 미증유의 시기에 치러진다. 이러다 보니 코로나19가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더욱 궁금해진다. 자칭 타칭 ‘정치 100단’이라는 전문가들도 섣불리 예측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 여부가 이번 선거의 중요한 선택 기준에 포함될 것이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국민 대다수는 그동안의 선거가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잊고 살았다. 어느 당이 총선이나 대선에서 이기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한 세상’은 절대 양보하지 못하는 지향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처럼 살아생전 겪어 보지 못했던 위기에 처하니 새로운 잣대로 선거를 대할 수밖에 없게 됐다. 진보나 보수 이념이 아무리 고상해도 국민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모래 위에 세운 누각이라는 것은 코로나19가 던진 교훈이다.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하는가는 개인의 선택이다. 다소 미흡하나 그래도 여당의 국정운영 능력이 준수했다는 판단이 서면 그쪽을 찍으면 된다. 반면 더 과감한 정책 추진과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마음이 들면 야당에 그 역할을 맡기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전제는 깔려야 한다. 국민 안전보다 득표에 혈안된 정당과 정치인은 도태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코로나19도 이겨낸 위대한 코리안’이라는 자부심이 국민 권리 행사를 통해 다시 증명됐으면 한다.
세종본부장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