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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청군 홍군으로 나뉜 선거판 /이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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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4-13 19:29:08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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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에 무리 지어 핀 영산홍이 붉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고요하게 붉다.

꽃의 시인 김춘수는 꽃은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된다고 하였는데, 어쩌다가 지금은 교정에 꽃을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줄 학생들이 없다. 온라인 화상강의를 시작하면서, 평소에 우리가 분주하게 사느라 스스로 가두지 못했으므로 그래서 내면을 돌볼 겨를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가두어진 것이라고 억지 반 진담 반으로 지금의 상황을 학생들에게 말하기는 했지만, 눈부신 봄날의 교정을 독차지할 때면, 학생들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진다.

적막한 교정과는 달리, 바깥은 시끄럽고 분주한 선거철이다. 학교 근처 숙소에서 연구실까지 오가는 것이 요즘 나의 일상이지만, 이래저래 목하 진행 중인 선거판을 보고 듣는다. 이번 선거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른바 우리나라 양대 정당이 표방하는 색깔이다. 색깔논쟁이라는 의미의 형이상학적인 색깔이 아니라, 그야말로 청실홍실 파랑과 빨강의 대결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현재 미래통합당의 분홍은 빨강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전후맥락을 보면 지금의 분홍은 빨강의 연속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파랑을 외치는 것도 아니고 미래통합당이 분홍을 외치는 것도 아니지만, 오관 중에 시각(視覺)이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는 감관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파란 점퍼와 빨간 점퍼는 그들이 외치는 구호 이상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청군 홍군 대결은 이미 지난 선거 때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단지 새누리당의 붉은색이 내 눈에 들어왔을 뿐, 이 두 색의 대결 구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나의 기억 속에 금기의 색인 붉은색이 우리나라 보수 정당의 당색(黨色)으로 쓰이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붉은색은 가슴속에 억눌린 금기의 색이었다. 지금 교정에 핀 영산홍의 붉은색,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는 붉은색은 붉은 광장, 붉은 군대의 색이었다. 나이 탓인가? 2002년 붉은악마였던가? 아니면 붉은 가마, 공리를 태우고 붉은 수수밭을 지나가던 장예모의 붉은 가마였던가? 내 안에 붉은색이 해방되는 씻김굿이 있었나 보다.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이 되었다.

파란색은 어떤가?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색깔이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파란색의 교과서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라, 붉은색에 대한 반감이 파란색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정당사에서 집권 여당의 당색이 거의 파란색 계통이었다는 것은 파란색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의 호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노무현의 노란색이나 박근혜의 빨간색은 파격이었다. 그럼에도 노란색은 본래 민주당 계열 정당의 주류 당색이었던 붉은색 또는 녹색의 연장선에서 볼 수도 있지만, 파란색을 일관되게 당색으로 사용해온 보수 정당에서 붉은색을 당색으로 한 것은 매우 파격이었다. 1970년대 박정희의 민주공화당과 대립했던 김영삼의 신민당 당색이 붉은색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2012년 박근혜의 붉은색은 실로 대단한 파격이었다.

이번 선거는 청군 백군의 대결이 아니라 청군 홍군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에서 청군 백군 대결을 할 때, 중국이나 일본 같은 이웃 나라에서는 청군 홍군 대결을 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한다. 어쩌면 이전의 청군 백군 대결에는 붉은색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길게 보면, 지금까지 진보 정당의 색이었던 붉은색이 오히려 보수 정당의 당색이 되었고, 역으로 보수 정당의 색이었던 파란색이 오히려 진보정당의 당색으로 자리 잡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가 서로 각자의 색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청색과 홍색은 보색(補色) 관계다. 가장 먼 색이지만, 그러므로 함께 두었을 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오히려 서로 돋보이게 하는 것이 보색이다. 혹 우리나라에도 그런 날이 있을까? 청실홍실처럼 보수와 진보가 보색으로 함께 빛나는 날이 있기나 할까?

선문대 대학원 통합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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