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기묘한 세계대전이다. 거의 모든 국가가 참전해 맞서 싸우는데도 3개월 정도에 200만 명이 쓰러지고 12만 명이 전사했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나고 사상자가 얼마나 늘지 가늠하기 힘들다. 초반의 이런 어이없는 패배로 모두 당혹해한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해 수행되는 정치의 연장”이라면, 적이 분명해야 하고 포연이 자욱해야 한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왜 시작했는지도 몰라 적의 실체가 모호하다.
적의 작전 수행능력만은 놀랍도록 ‘탁월’하다. 인간 몸속에 은밀히 침투하고 뛰어난 전파력을 가동해 부모 형제와 이웃을 공포의 대상으로, 신을 방패 삼아 자신에게 저항하려는 종교단체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세상 사람들을 ‘아시아인 혐오’로 자극하더니 결국 증오로 갈라놓고 폭력을 유발했다. 공포를 극대화해 사람 정신 줄을 놓게 한 다음, 사람들이 거짓뉴스를 만들고 언론을 통해 퍼뜨리게 하여 자신의 전략을 교묘히 은폐했다.
또한 중국과 한국 등에서 발생하는 특이한 전쟁으로 인식하게 하여 미국을 비롯한 유럽 일본 등 선진국 정치지도자들을 오만과 방심에 빠지게 한 다음, 인류가 축적한 기술로 만들어진 운송수단을 활용해 이들의 영토를 빠르게 점령하고 있다.
비로소 실체를 감지한 세계 정치지도자들은 허둥대며 총력전을 선포하면서 대항에 나섰다. 적도 가만있지 않았다. 준비 없이 선포된 전쟁의 약점을 파고들어 인간 이기심을 작동시키고 갈등과 혼란을 부추기며 선진국 정치지도자들의 허세와 무능함과 함께 제도적 허점을 노출시켰다. 미국과 중국 간 책임공방전, 미국 대통령과 WHO 사무총장 간 막말 퍼레이드, 일본의 한국 방어전략에 대한 흠집 내기, 마스크 등 ‘전쟁물자’에 대한 선진국 간 약탈적 징발 등이 공동의 적에 대한 국가 간 연합전선을 방해한다.
한국은 총선과 맞물리면서 정치적 승리를 위해 쏟아낸 정치가들의 말과 행동, 구태의연한 진영논리로 무장하여 진실을 거부하는 언론의 행태, 이 와중에 자신만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경총의 집단이기주의적 형태 등이 더해졌다. 그 결과 적전 분열이 효과적으로 진행됐다.
국경이 폐쇄되고, 도시가 봉쇄되고, ‘사회적 거리두기’ 이름하에 이웃과 교류·협력이 차단되면서 우리는 집안에서 고립되어 간다. 우리가 좁은 공간에 유폐되니 교통수단이 멈춰 서고, 학교가 문을 열지 못하고, 교회와 사찰이 텅 비고, 예술문화 행사가 취소되고, 식당이 문을 닫고, 물류가 정지됐다. 노동자는 실업 공포에, 기업은 도산 위협에 불안해한다.
불안과 공포는 일상 소비활동을 더욱 위축시킨다. 이는 관련 산업 전후방 연관체계를 무너뜨린다. 투자가 줄고 금융시장이 요동치면서 세계적 경기 침체의 어두운 그림자가 엄습한다. 이 전쟁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강제보다 자유로, 차별보다는 평등으로, 고립보다 개방으로, 폐쇄보다 교류로, 증오보다 사랑으로, 대립보다 상생으로 구축해온 인류 문명의 토대를 흔들고 있다.
긴 기간 고통스럽지만, 결국 인간이 승리할 것이다. 항시 우리 롤 모델이던 미국 유럽과 일본 등이, 또한 세계 전문가들이 우리 모델을 근간으로 이 전쟁에 대응해야 한다고 평가하니 뿌듯하기까지 한다. 낯설지만 어느덧 이 전쟁 선두에서 한국이 지휘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전쟁이 한 번으로 끝날까? 또한 이전의 우리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 많은 전문가는 아니라고 답한다.
세계대전이 끝나면 세계는 반드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할 것이다. 일상에서, 생산과 소비 또는 경제 구조에서, 인적 물적 교류 방식 등 모든 부문에서 변화가 불가피하다. 이런 변화가 모여 우리 문명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새로운 변화 물결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왜 이런 전쟁이 발생했는가” 차분히 물어야 한다. 아예 새로운 사고체계를 찾는 논의를 시작해 신질서 구축을 준비해야 한다.
진정한 위험은 승리에만 도취해, 타인의 칭찬에 매몰돼 이 전쟁의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 도사리고 있다. 노혜경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세상 모든 근심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순 없지만 병들어 서러운 마음만은 없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해양대 국제무역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