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경기에서 모두가 공의 궤적을 뒤따르며 미시의 세계에 집중할 때 조금은 무심한 듯 전체 판세를 지켜보는 사람을 발견할 때가 있다. 감독이다. 팔짱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감독의 머릿속 목표는 백전백승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KBO 리그 우승팀 두산 베어스는 88번 이겼지만 55번 졌다. 감독은 9회까지 가야 하는 경기 전체를 염두에 두며, 144경기를 치르는 장기간 리그 자체를 내다본다. 요컨대, 미래를 본다.
올해 읽은 최고의 책 가운데 하나는 ‘인듀어런스-어니스트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뜨인돌출판사)다. 섀클턴은 1914~1916년 634일에 걸친 남극 탐험과 지옥 같은 조난 상황에서 대원 27명을 모두 살려낸 위대한 탐험가다. 이 책은 담담하다. 섀클턴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순간, 결단과 희생이 필요한 모든 상황에서 섀클턴이 반 발짝 앞서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흥분하지 않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듯하다가 결정하고 실천하고 희생하고 책임진다. 그는 어디를 보고 있었을까? 닥쳐올 시간, 미래였다.
이번 4·15총선이 보여준 건 뭘까? 민심의 실체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정부와 문재인 대통령이 잘 대처했다고 판단한 많은 국민이 높은 점수를 준 것이 밑바탕이 됐다. 그렇게 움직인 전국 표심에는 코로나19 위기를 어떻게든 이겨내는 정부라면 그다음에 올 위기나 더 큰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고 이겨내기 바란다는 바람과 판단도 들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민심이라는 ‘동전’의 뒷면을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다. 앞으로 엄습해올 더 큰 어려움과 위기에 잘 대처하지 못하면, 이번에 준 지지를 거두겠다는 뜻이다. 21대 국회에서 여당이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민심이라는 공이는 되돌아와 여권을 칠 것이다. 여당이 이번 총선에서 얻은 의석이 매우 많다 보니, 여당이 교만해질 공산은 커졌다. 대화와 타협 필요성이 덜해졌기 때문이다. 야당이 극단적 대응과 대립으로 쏠릴 확률은 높아졌다. 선명성을 부각해야 존재감을 잃지 않고, 지지층을 결집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4·15총선 결과를 받아 들고 화들짝 놀란 대목이 있다. 작은 정당을 포함한 건전하고 다양한 정치세력이 비집고 들어가 활동할 공간이 매우 좁다는 현실을 확인한 것이다. 조선 시대 당쟁사를 참고하자면, 거대 정파가 1대1로 맞대결할 때는 극단적 대립이 펼쳐져 갈등 수준이 치솟고 피바람이 불곤 했다. 백성을 위한 정책도 잘 생산되지 않았다. 작든 크든 제3 세력이 존재할 때는 연정이나 정책연합이 이뤄지면서 갈등 지수가 낮아지고, 백성을 위한 정책이 시도되곤 했다. 21세기 자체가 다양·섬세·발랄·창의를 요청한다. 21세기 한국 정치에도 꼭 필요할 텐데, 과연 될까?
이런 판국에는 가짜뉴스도 큰 걱정이다. 이번 총선에서 겪은 일이다. 어르신 한 분께서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왔다며 ‘이탈리아의 노인 연행 동영상’이라는 걸 보여주신다. 코로나19 확산이 심각한 이탈리아에서 ‘공권력이 거리에서 노인을 마구잡이로 연행하는 현장’이라는 거였다. 물론 한눈에도 설익은 가짜뉴스임을 알 수 있었다. “가짜뉴스니 안심하시라”고 하자 수긍하셨지만, 일말의 불안이 그분 표정 위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봤다. 비열한 짓이었다. 가짜뉴스와 확증 편향이 확산할 확률은 높다.
이렇듯 과제와 도전은 많다. 희망의 근거도 분명하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코로나19 위기 와중에 우리는 한국이 ‘민중의 나라’임을 확인했다. 세계에서 화제가 된 ‘K-방역’의 저력은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시민의식에서 나왔다. 그 특징을 ▷민주성 ▷투명성 ▷개방성이라 할 때, 출발은 민주성에 있다. 민주적이므로 투명하고 개방적일 수 있고 거기서 창의성이 튀어나왔다. 4·19혁명, 87년 민주항쟁, IMF 금융 위기 극복, 2002년 월드컵, 촛불혁명의 경험과 역사가 흘러가 버린 게 아니라 어딘가 쌓이고 농축됐음을 뜻한다.
지금도 직전 정부 고위 인사가 당시의 회의 때 강조했다는 원칙을 잊을 수 없다.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 한국은 이런 과거 방식과 철학으로 국제 사회에서 이길 수 없다. 생존조차 못할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 정부가 떠안은, 실패해서는 안 될 과제는 우리 사회와 나라의 체질을 바꾸어 미래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개혁을 지속하는 데 있다. 게다가 코로나19 위기가 진정되더라도, 곧장 더 크고 강한 위기가 올 것이다. 경제 위기가 가장 클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일은 관점을 당장 미래로 옮기는 것이다. 배를 띄우기도, 덮치기도 한다는 강물의 흐름을 차분히 냉철하게 보는, 미래를 향한 눈길이 필요하다.
편집국 부국장 겸 인문연구소장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