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가 20년째를 맞은 2020년의 새 희망을 노래한 게 엊그제 같은데 4개월이 훌쩍 지나고 있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고 있지만, 누구나 1년 중 3분의 1이라는 긴 시간을 혼돈 속에서 그냥 허송한 느낌이다. 방어할 틈도 없이 갑자기 툭 다가온 전염병 창궐 세상에서 공기처럼 익숙했던 생활 패턴과 사회 체제 등이 일시에 무너지면서 생긴 현상일 게다. 바이러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간 죽이기’가 다반사였던 일상도 세월이 흐르면 ‘다 지난 일’이 될 테다.
전 세계를 짓누르는 코로나19 사태는 나라 간 자유로운 출입도 막았다. 이웃처럼 가깝게 보였던 다른 나라와의 거리감이 고무줄처럼 확 늘어났다. 국경 봉쇄는 물론 뱃길이든 하늘길이든 빗장을 꽁꽁 걸어 잠글 수밖에 없는 21세기 풍속도는 지난 세기 세상 곳곳에서 터진 세계분쟁의 격동기에도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이전에는 전쟁 중이라도 수많은 사람이 목숨 걸고 막힌 국경을 넘나들었건만, 21세기에는 자본과 사람이 국경을 넘지 않고 각자도생의 세상이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 항공기는 날개가 꺾였다. 물류는 흐름이 원활하지 않다.
공교육은 실험 중이다. 각급 학교 졸업식 현장이 사라진 데 이어 입학식은 아예 자취를 감췄다. 새 학기 개학은 연기에 또 연기를 거듭하다 못해 고등학교와 중학교 3학년부터 순차적으로 온라인 개학을 진행했다. 학교 문은 굳게 닫혔지만, 540만 명의 학생이 앞선 세대는 상상도 못했던 ‘재택수업’을 받고 있다. 봄소풍과 수학여행 등 전통의 학교생활 풍습이 물 건너 간 터라 미래세대가 평생 살면서 아로새길 소중한 추억거리를 날려버렸다. 학생과 교수 간 비대면 수업을 도입한 대학가의 20학번 새내기들은 입학 시즌 들뜬 ‘캠퍼스 낭만’을 누리지 못해 아쉽겠다. 그게 다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스포츠와 문화계는 현장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 골프 등 스포츠 시장의 주요 경기가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수많은 관중과 갤러리들의 응원 열기와 함성으로 존재가치를 찾았던 스포츠의 소비 현장은 꽁꽁 얼어 붙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 기미를 보인 우리나라에서는 프로야구가 다음 달 5일 관중 없이 플레이볼을 선언하면서 뒤늦게 시즌 개막을 알렸다.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 여자골프는 다음 달 14일 ‘제42회 KLPGA챔피언십’을 시작으로 올 시즌의 명맥을 잇기로 했다. 매년 톱니바퀴처럼 되풀이되던 스포츠 이벤트의 모든 게 헝클어졌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기꺼이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잠시 아쉬웠을 뿐이다. 4년 만에 열리게 된 일본 도쿄올림픽 연기를 따지는 사람도 없고, 이제는 취소해도 무방하다는 의견이 늘고 있다.
극장가는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다. 1000만 관객 동원이라는 화제의 영화는 고사하고 개봉작을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올해의 세계 영화시장 흐름을 가늠할 이탈리아 베니스와 프랑스 칸 등 세계 주요 영화제의 레드카펫은 온데간데없다. 모든 공연장의 무대와 객석에는 먼저가 잔뜩 쌓였다. 미술 전시장은 개점휴업 중이다. 문화산업의 빙하기가 따로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덧 ‘방 구석 문화 현장’에 익숙해지고 있다. 온라인 실황중계 등 앞으로 문화 상품의 생산과 향유 형태의 혁기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장면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배달 문화가 발전을 거듭하고 대형 매장이 문을 속속 닫는 등 소비 시장의 판매와 구매 시스템은 대폭 수술 중이다.
세상 흐름과 맞물려 수많은 업종과 직업의 흥망성쇠가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공교육 수업과 의료계 진료 형태의 지난 시절 시스템이 곧 구시대 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성급한 진단이 나온다. 사람 간의 비대면 거리두기가 사회 표준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연관 산업과 파생 업종이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받는 등 변화의 물결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흐르고 있다.
팬데믹(전염병의 대유행)이 그동안 통용됐던 질서를 한순간에 뒤엎었다. 세상 질서는 새로운 형태로 교체되는 분위기다. 사상 최초로 온라인 개학을 경험한 540만 명의 학생은 옛 질서를 낯설어 할 때가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그들은 20세기 사람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세대가 아닌가. 앞선 세기 발발했던 수많은 전쟁 이후에는 항상 세상 질서는 바뀌었다. 낯설었던 게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누구나 새 체제에 적응했다.
2차, 3차 팬데믹도 예고된 상황에서 변화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21세기 새 물결의 정체를 따져보고 능동적으로 변화를 모색 중일 게 분명하다. 전쟁보다 무섭다는 전염병이 언제가는 오게 될 새 질서의 도래 시기를 예상보다 더 일찍 앞당겼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선제적으로 대응하자. 한 발 늦으면 도태된다.
논설위원 choonjin @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