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병원 외과의사가 1년 중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아마 해외 학회에 참가할 때가 아닌가 싶다. 언제 생길지 모르는 뇌사자 때문에 잘 때도 곁에 휴대전화를 놓고 자며 긴장을 못 늦추고 살다가, 학회 참석이라는 이유로 아무 거리낌이나 죄책감(?) 없이 해외에 나가는 것으로 과장해서 말하면, 휴가 받은 군인이나 모범수 기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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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서상균 |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는 해외학회에 가서, 꼭 필요한 부분만 참석하고 나머지 시간에 그 지역 유명 관광지 방문하고, 맛있는 음식 먹고 노는 게 좋기도 했으나, 나이 들면서 그동안 진료한 환자를 바탕으로 연구한 내용을 전 세계 유명한 의사들 앞에서 발표하고, 내가 몸담은 분야 ‘최신지견(최신의 지식과 견문)’을 배우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 교제하는 즐거움이 더 커졌다. 특히 내 전공 분야인 췌장이식은 세계적으로도 종사하는 사람 수가 많지 않아, 2년마다 열리는 ‘국제췌장 및 췌도이식 학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서도 약 300~400명밖에 안 되는데, 그중 췌장이식 수술을 직접 시행하는 외과의사는 3분의 1 정도인 것 같다. 그래서 국제학회에서 만나면 다들 끈끈한 유대감을 나눈다.
내가 지금 근무하는 병원에서 새롭게 췌장이식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그간 국내에서 시행된 수술과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췌장은 십이지장에 완전히 붙어 있기에 분리할 수가 없어 십이지장과 췌장을 같이 이식하는데, 이식된 십이지장 내부를 내시경으로 관찰한다면 혹시 이식된 췌장의 거부반응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의사 루네 호넬란드(Rune Horneland)란 분의 논문이 전 세계 여러 논문 중 특히 흥미로웠다. 이 논문을 쓴 노르웨이 의사들은 이식한 십이지장을 환자의 십이지장에 직접 문합(꼭 들어맞도록 연결)해 내시경을 통해 이식된 십이지장을 더욱 쉽게 다루는 방법을 자세한 그림과 함께 소개했다. 이 논문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뇌사자의 십이지장과 수혜자의 십이지장을 문합하는 방식을 우리 병원에서 도입했고,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2017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린 세계췌장이식학회에서 이 분(Rune)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외모가 북유럽 사람 같지 않고 동양인처럼 생겨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내 소개를 했다. 한국에서 왔으며 당신 논문을 보고 우리 병원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수술한다고 말하니 매우 기뻐하면서, 사실 자신은 어렸을 적 한국에서 노르웨이로 입양된 한국계 노르웨이인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얼마나 놀랍고 반갑던지! 그 학회 이후 우리는 의형제처럼 지낸다. 2018년에는 같이 미국이식학회에 참석해 학술행사가 끝나는 저녁마다 시애틀 맛집과 명소를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생부·생모를 찾으러 1년에 한 번 정도 한국에 오는데, 20년 이상 별 소득이 없어 이제 사실 반쯤 포기한 상태지만, 한국 음식과 사람들을 좋아해 그래도 매년 오며 그때마다 우리는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낸다.
지난해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 이식주간’에 초청받아 강연도 했고, 우리 병원에 며칠 방문했는데, 그때 우리 병원에서 뇌사자가 생겨 이식수술도 도와주었다.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요즘 의학 드라마를 보면 우리나라 외과의사가 세계에서 가장 수술을 잘한다고 여길 수도 있는데, 어느 정도는 맞지만, 나는 루네에게 많이 배웠다. 손재주가 좋은 우리나라 DNA에다 노르웨이의 수준 높은 의학과 교육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어떤 만남은 정말 운명적이라고 느낀다. 나는 한국에서 자라 한국의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중 외과의사가 되었고, 외과의사 중에선 장기를 이식하는 외과의사, 그중 췌장이식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됐다. 새로운 수술방법을 찾는 데 도움을 준 논문을 쓴 사람이 노르웨이인이었는데,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을 잊지 못하며(최근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새로 만난 한국인 의사와 형 동생이 됐다. 운명 아니면 무엇일까? 이 운명에 감사한다.
양산부산대병원 외과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