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사회적 거리두기’다. 처음에는 별로 어감이 좋지 않았다. 공감 연대 등의 말과 달리 용어 자체에 ‘거리’라는 소외적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가까이하지 말라는 뜻이다. 친밀감이 배제된 용어다. 소외된 사람을 더 소외되게 할 수도 있다. 차단된다는 느낌도 든다. ‘사회적 거리두기’에는 불편함도 있다. 버스 도시철도 택시·서비스 시설·오락 시설 이용에 거리를 두어야 하니 당연한 얘기다.
필자도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러 불편을 경험한다. 코로나 사태로 전국 법원이 사실상 한 달 정도 휴정기를 가졌다. 수사기관도 소환조사를 잠정 중단하거나 최소화했다. 법원이 휴정하고 수사기관 수사가 보류되니 사건 선임이 줄었다. 잠재적 의뢰인들은 변호사 사무실 방문을 미루고, 변호사 사무실도 상담 등을 줄였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확진자라도 나오면 당분간 사무실을 폐쇄해야 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가 변호사 생계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사태의 정점을 지나자 법원 재판이 재개되고 수사기관도 소환조사를 시작했다. 필자도 법정에 출석해 재판을 하고 구속 피고인을 접견하려고 구치소를 방문했다. 법원에 들어갈 때 마스크를 쓰고 체온 측정을 받았다. 법정 안의 모든 관계자가 마스크를 썼다. 재판부, 당사자, 대리인, 검사, 변호인, 교도관, 방청객 모두 그러했다. 증인신문할 때 증인 표정은 중요하다. 재판부의 심증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대리인이나 변호인의 신문과정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증인도 마스크를 쓰고 증언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었고 때로 증언내용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불편했다. 구치소로 접견 가니 평소 이용하던 변호인 접견실은 폐쇄됐고 일반인 접견실에서 접견해야 했다.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일반인 접견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변호인의 불편함은 갇혀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서민은 더 큰 불편함을 생활 곳곳에서 겪고 있다. 코로나 사태 여파로 경제적 불황까지 더해지니 정말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본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생활화된 지금이 역사적으로는 그렇게 ‘거리두기 사회’가 아니라는 점이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생활이 보편화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인류 역사 대부분에 걸쳐 지금보다 더 떨어져 살았고 더 불편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우리가 지금 겪는 불편과 고통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만큼 서로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나와 네가 고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는 잠정적·한시적 의미가 내포됐다. 계속 거리를 두라는 말이 아니다. 안전해 질 때까지 거리를 두라는 의미다.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다. 인간 본성에 반하기 때문이다. 불편하더라도 안전해질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자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최소화하기 위해 사회생활에서 최소한의 거리를 두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물리적 거리두기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심리적 거리두기가 되면 안 될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과정에서 심리적 거리가 수반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해도 각자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국제신문 ‘메디칼럼’(지난 7일 자 21면)에서 이경미 부산의료원 비뇨의학과 과장이 소개한 각계각층의 응원과 지지 메시지는 그 노력의 일환이다.
TV에서 한 성악가가 입원 환자, 수고하는 의료진, 여러 이유로 격리된 사람들을 위해 건물 밖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을 봤다. 공연장에서 운집한 대중을 상대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뭉클했다. 소방관들이 연습한 춤을 선보이며 격리된 사람들을 잠시나마 즐겁게 해주는 장면도 그러했다. 그렇게 인류는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 더 가까워진 사회를 기다리며 당분간 잠시 거리를 둘 뿐이다.
변호사·법무법인 청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