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어스름에는 강렬한 빛의 조짐이 있었다. 그 빛은 필시 세계를 비출 터였다. 그는 알았어야 했다. 자기를 모를 때 삶은 뒤틀린다. 뒤틀린 삶은 감정 소모다. 굴욕이고, 질투며, 오만이고 불안이다.
‘인해’(부산에 사는 50대의 평범한 생활인으로 생각하시면 된다)는 자기를 몰랐다. 앞서 나아가는 수많은 자아를 자기라 생각하며 그는, 단지 살았다. ‘단지 살았다’는 말속에는 애처로움의 냄새가 배어 있다.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더구나 같은 시공간 속에 있는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계산대 앞에서 술값을 서로 내겠다며 싸우는 아저씨들만큼이나 모순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은 제대로, 잘 살기 위함이다.
삶이 실력이라면, 인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돈과 시간은 부족했다. 재능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모여야 한다.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들어가야 하고, 재미를 잃지 않아야 한다. 좋은 리더를 만나야 하고, 그 분야가 발전하는 곳이어야 한다. 인해에게는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재능은 맴돌 뿐이었다. 실력은 요원한 것 혹은 그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인해는 부끄럽고 부러웠다.
삶이 힘이라면 인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힘센 사람들의 위협은 그것이 터무니없는 것이라 해도 현실화되는 속성이 있다. “정의와 힘이 같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힘은 매우 용이하게 식별되고 논란의 여지도 없다. 인간은 정의를 강하게 할 수 없으므로 강한 것을 정의로 만들었다.”(파스칼 ‘팡세’ 중에서) 인해는 낮은 포복에 익숙했다.
삶이 관계라면 인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결정적 관계없이 결정적 성취는 불가능한 법이다. 어색하고, 속 보이고, 짜증 나고,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시공간에서 인해의 자아는 부자연스럽고, 자기는 그런 자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계의 핵심은 말과 감정과 행동을 몸에 가두는 것인데 인해는 그것에 대한 거부감과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삶이 불안정과 불안이라면 인해에게는 적절한 것이었다. 안정과 월등함 앞에서 인해는 초라해지고, 부족함과 미숙함을 느꼈다. 인해는 불안정과 불안이었다.
인해는 콤플렉스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삶의 실력, 힘과는 관계가 없었다. 불안정했고 불안했다. 내부의 충돌도 많았다. 항상 주눅 들어 있었고 움츠러들었다. 인해는 애태우고, 애썼다. 전 생을 걸었고,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시간은 차곡차곡 쌓였다. 드디어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인해의 탁월함을 발견하고 드러낼 것이었다.
삶이 내부의 경쟁이라면 그것은 인해였다. 인해는 읽고 배운 것을 삶에 붙였다. 그럼에도 자신은 더 배워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인식했다.
삶이 아름다움이라면 그것은 이제 인해였다. 인해는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좋은 사람들에 묻혀 사는 것,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의미다’라고 인해는 생각했다. 삶은 재편되었다.
삶이 우정이라면 그것은 이제 인해였다. 우정은 만면에 즐거움을 머금은 얼굴이다. 욕망은 우정에 기반할 때 온전하게 추구된다. 우정은 함께 향유하는 것이다. 우정은 삶의 원천, 추구해야 할 궁극이다.
삶이 세계적이라면 그것은 이제 인해였다. 인해는 지방적 개념을 넘었다. 서울적 개념도 넘었다. 세계적 개념에 인해는 도달했다.
삶이 실력이라면 그것은 이제 인해였다. 경쟁 속에서 인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탁월해졌다. 그 탁월함은 전면적인 재설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새벽의 어스름에서 강렬한 빛을 본 바로 그날 인해는 자기를 인식했다. 그는 그가 생각하는 그가 아니었다. 그는 보편이고 기준이었다. 이전 삶과는 다를 것이었고, 이전 삶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었다. 거대한 공백의 시대, 인해는 자기를 인식했다. 그는 나아갈 터였다. “우리는 공동의 역사, 공동의 책입니다.”(마이클 온다치, ‘잉글리시 페이션트’ 중에서)
동명대 겸임교수·도서출판 함향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