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사회를 개혁하려 했던 학문과 그 학문에 몰두했던 학자들, 이것이 우리가 실학과 실학자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일 터이다. 실학이 주장한 개혁의 내용은 실로 다채롭다. 하지만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토지 소유와 분배 문제에 관련된 것이었다. 곧 특정한 소수가 토지를 독점하는 것, 뒤집어 말하자면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해 생산물의 70~80%를 지주와 국가에 빼앗기는 것이 사회모순의 핵심이라는 것은 당시 양심적 지식인이면 모두 공유하는 사실이었다.
이런 이유로 개혁적 지식인들의 관심은 농민이 적절한 양의 토지를 소유하고 자경(自耕)하여 삶의 안정성, 나아가 사회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방법에 쏠렸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토지를 모든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히는 방법, 마을 단위로 토지를 공유하고 노동량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하는 방법,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설정하여 특정 개인이 과도한 토지를 보유하는 것을 막아 결과적으로 토지의 고른 소유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 등 실로 다양한 대안이 모색되었다.
하지만 이런 개혁책이 실행된 적은 없었다. 예컨대 실학의 비조라고 하는 유형원(柳馨遠)을 시작으로 이익(李瀷) 유수원(柳壽垣)을 거쳐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인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정약용, 조금은 낯선 우하영(禹夏永) 최성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개혁책을 제출했지만 어느 하나도 채택 되어 실행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학의 개혁책은 극소수 지식인만이 아는 것이었기에 실행되지 않았던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개혁책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컨대 유형원의 저작 ‘반계수록’은 지식인이라면 너나없이 그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는 저작이었다. 숙종 때는 배상유(裵尙瑜)가, 영조 때는 양득중(梁得中)이 상소하여 이 책의 개혁책을 실행에 옮길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형원의 개혁책에 열렬히 찬동했던 홍계희(洪啓禧)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조는 이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실학이 제출한 거의 모든 개혁책의 운명은 동일했다. 실행되지 않고 오직 책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 상업과 무역을 지원하여 생산을 자극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역시 종이 위의 한가로운 이야기였을 뿐이다.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가 공정성을 완전히 상실하자, 제도를 고치자는 의견이 백출했지만 그 역시 실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재를 문벌과 지역, 당색(黨色)으로 차별하지 말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 역시 하기 좋고 듣기 좋은 꽃 노래일 뿐이었다.
개혁책은 왜 실행되지 않았던 것인가. 유형원으로부터 우하영에 이르는 지식인의 저작은 중요한 한 가지 아이디어, 곧 개혁책을 실행하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고 했는데, 개혁책이 ‘부뚜막의 소금’이라면, 그것을 음식에 집어넣는 과정과 방법에 대한 생각이 도무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개혁책은 조선 사회의 지배층인 사족과 지주의 기득권을 해체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의 저항은 충분히 예상되는 바였다. 결국 문제는 하나로 수렴된다. 어떤 방법으로 사족과 지주의 저항을 누르고 개혁을 관철시킬 것인가. 실학은 이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했어야만 하였다. 하지만 어떤 실학자도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개혁에 대한 주장을 책으로만 써대거나, 개혁이 뭔지도 모르는 무능한 왕에게, 혹은 개혁할 필요를 느끼기는 했으되, 개혁에 반대하는 기득권 관료들에게 포위된 왕에게, 상소문을 올리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것이 실학이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던 이유다.
다산은 백성을 업고 싸우면 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약 실학자들이 오직 백성을 위해 백성의 앞에 서서 개혁을 외치고 나섰다면, 아마도 실행의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수많은 개혁책이 종이 위의 검은 글씨로만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총선이 끝났다. 더불어민주당은 압도적 의석을 갖게 되었다. 국민이 실학의 실행프로그램을 손에 쥐여준 것이다.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오늘날의 실학을 곧장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