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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작은 언어로 소통하기 /문형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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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05-14 20:03:50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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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여수 금오도에 백패킹을 다녀오다 지난 일이 생각나 혼자 실실 웃었다. 이태 전 이맘때지 아마. 그때도 비렁길을 걷기 위해 나 홀로 금오도로 갔다. 여수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함구미항에 내렸다. 안내판으로 가 길의 방향을 가늠하고 있는데, 오십 후반의 중년 부부가 다가왔다. 이들도 등산복 차림이라 섬 주민 같지는 않아, 내가 먼저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함구미에선 나 외에 하선한 사람은 없었으므로.

이들은 비렁길 종주하러 신기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을 타고 여천항에서 내려 걸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들의 여정을 듣고, 나도 함구미에서 장지까지 종주할 요량이라고 했다. 종주 산행을 해본 사람은 알 테지만, 내내 같은 길을 걸어가므로 같은 시각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 사람들끼리는 자주 얼굴 보기 마련이라. 이후로, 우리 역시 중간중간 쉼터에서 만나며 같은 길을 걸었다.

섬에는 야생화가 만발하고 있었으니만큼 그 부부는 꽃향기 맡아가며 사진 찍느라고, 나는 바다와 풍경 감상하느라고, 양측 모두 걷는 속도가 그야말로 오십보백보였다. 몇 번의 마주침이 있은 뒤, 전망대 벤치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하얀 꽃을 가리키며 부부 중의 아내 분이 내게 물어왔다. “혹시, 이게 무슨 꽃인지 아세요?” “찔레꽃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부부는 동시에 반문했다. “찔레꽃요?” 의아한 듯 남편 분은 흘러간 가요까지 들먹이며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아니, 예전에 자주 들었던 ‘찔레꽃~ 붉게 피~는’ 그 노랫말을 보면 찔레꽃은 붉다고 했는데, 이 하얀 꽃이 찔레꽃이라고요?” 그래서 나도 노래 한 소절로 응답해주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덧붙여 (실제론 연홍색인) 붉은 찔레꽃도 있긴 하지만 하얀 찔레꽃이 더 지천이다는 내 얘기를 듣곤 두 분 다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직포의 다른 민박집에서 각각 하룻밤을 지낸 우리는 다음날도 어제와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다 점심때는 같은 식당에서 음식을 사다가 야외에서 나눠 먹는 사이로 가까워졌다. 도란도란 얘기하며 장지마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숫제 일행처럼 어울려 다녔다. 방파제를 둘러보고 정류장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저 앞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에게로 갔다. 붙여놓은 버스 시간표대로라면 많이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시간표가 틀림없는지 물어보려.

할머니 세 분은 삥 둘러앉아 말린 완두콩을 까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면서 인사차 “할매들이 완두콩을 까고 계시네요.” 하곤 콩깍지를 까서 입에 한 알 넣고 깨물었다. 수확할 시기의 단단한 콩알은 비린내가 나는 줄 알면서도 너무 오래전에 본 완두콩이라 그리워서.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한 할머니가 불쑥 말했다. “아따, 보리밭에 엔간히 들어갔나 보요잉?” 나는 으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아니, 할매가 동생들한테 망꾼을 더 많이 시켜놓고는.” 그 말에 할머니들이 박장대소하며 이구동성으로 “맞소잉” 했다. 한데도 이들 부부는 영문을 몰라 눈만 멀뚱멀뚱했다. 부부는 대구 도심지에서 나고 자라 찔레꽃을 몰라봤듯, 나와 할머니들이 나눈 대화 내용을 몰라서였다.

완두콩은 보리가 파릇파릇 커가는 4월 중순쯤 좁쌀만 한 콩알이 맺히기 시작하는데, 이때 콩깍지 채 따먹으면 그 단맛이 기막히다. 배고프던 시절 그걸 따먹으려면 남의 눈에 들키지 않게 보리밭에 숨어들었다가 따먹어야 했으므로, 그 할머니의 말인즉 ‘남의 보리밭에 들어가 서리 많이 해 먹었지 않았느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어릴 때는 혼자 서리 짓 하기란 어려워, 친구나 동생더러 망을 보라고 시키기 일쑤였다. ‘할머니도 그랬지 않았느냐?’는 내 응수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린 거였다.

이처럼 사람 간의 소통에는 꼭 거창한 구호나 유려한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더욱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개개인은 물론 집단 간에도 의심해야 하고, 총선을 치르면서 정치적 견해 차이로 저마다 사이가 멀어진 지금에는. 서로가 통하는 데는 큰소리나 대국적인 언사보다는 작은 언어가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국어사전 또는 백과 용어 중에 따로 작은 언어라는 게 있겠냐만, 수수하고 정겨운 말들이 사람 간의 거리를 좁혀준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도회지 출신의 그 부부와 농촌 출신의 내가 찔레꽃이란 작은 언어로 비렁길 종주를 즐겁게 끝냈듯이. 완두콩이란 작은 언어로 나와 할머니들 간 세대를 넘어, 영호남을 넘어 한바탕 폭소 잔치를 벌였듯이. 작은 언어로 통하다 보면 혹시 아는가. 그 부부가 고맙다며 자신들의 승용차로 여수 시내까지 나를 태워주었듯 당신에게도 더 멋진 일이 일어날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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