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 하나까지 알뜰히 털어먹는 일수꾼마냥 신종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신나게 헤집어 놓았다. 코로나19를 전후해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 도래할 거란 의견도 있다. ‘코로나 시대’가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될지 아니면 단순한 수사적 표현에 그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 가지 사실 만큼은 확실히 인식시킨 듯하다. 바로 ‘과학기술’이 그 자체로는 철저히 무력하다는 깨달음 말이다.
사람들은 코로나19를 통해 과학보다는 ‘사회의 위력’을 실감했다. 한국의 방역 총력전, 신천지가 드러낸 특정 종교집단의 민낯, 구로 콜센터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온갖 측면을 들췄다. 덕분에 마스크 배급제부터 국경폐쇄, 재난기본소득 심지어는 민주주의에 대한 거대 담론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백가쟁명이 4·15총선과 맞물려 벌어졌다. 전염병은 이미 과학기술을 넘어 사람과 사회의 문제가 되었다.
과학기술이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 출발점은 과학기술이 곧 ‘생산성 향상을 통한 소득증대’의 수단으로 정의되면서부터다. 신지식인, 녹색성장, 창조경제, 그리고 지금의 4차 산업혁명까지 역대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역시 이름만 바꿔왔을 뿐 본질은 같았다. 사람 없이 일하고 사람처럼 일하는 기계.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인공지능이 약속한 것은 바로 이런 기계 같지 않은 기계들이다. 미래형 기계들은 사람 없이 일하기 때문에 경제적이고, 사람처럼 일하기 때문에 사람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한다.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는 모르겠으나, 그 범위는 점차 확대될 것이다. 경제성만을 기준으로 인공지능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결론은 이미 나온 듯하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닮았다.
과학기술은 단지 생산성을 높여 국가에 이바지하는 도구가 아니다. 과학기술은 정치·경제·사회가 얽히고설킨 기술-인간 복합체의 형태인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의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테크노사이언스를 통해 재구성된 과학기술의 특징은 그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과학기술은 음습한 연구실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나 고풍스러운 교정을 거닐던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나오지 않는다. 과학기술 연구가 ‘과학 영웅’의 단독작업이 아닌 만큼 그 출발부터 철저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한 연구계획서는 고도의 정치적인 작업이다. 연구주제를 스스로 찾는 일에 능숙해야 하며 정부의 ‘니즈’를 찰떡같이 알아먹고 연구비는 적정수준에 맞춰야 한다. 연구 수행 과정에서도 온갖 종류의 사회적 갈등이 뒤따른다. 흔히 과학의 ‘차가움’을 비판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을 이야기하지만 이미 과학은 지극히 인간적인 셈이다.
과학기술이란 보검을 이용해서 복잡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과학기술이 사회의 문제로 인식되는 순간, 시민의 역할도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간 ‘교양’으로서의 과학은 양자역학처럼 어렵지만 ‘있어 보이는’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이에 감탄하는 일에 불과했다. 과학기술의 사회성을 이해하려면 차라리 SF(Science Fiction)를 읽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다. SF야말로 과학기술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사회는 과학기술의 개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가장 정교하게 풀어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시민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촉발된 백가쟁명이 그 증거다. 과학기술로 촉발된 사회적 논의가 단순한 진흙탕 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 건설적인 결과로 이어지려면 더 많이 공부해야겠지만 말이다. 다가오는 4번째 과학혁명은 경제적인 성장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성장지상주의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누구나’의 관심 속에서 개개인의 본성과 감성이 인정되며 사회적 불평등이 해소되는 따뜻한 사회, 인간중심 사회로 전환해주는 ‘사회적 혁명’이 되길 기대한다.
부산대 생명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