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6월 14일 “한번 승첩했다 하여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군사를 위무하고 전선을 다시 정비해 두었다가 급보를 듣는 즉시로 출전하되 끝과 처음을 한결같이(終始如一) 하도록 하라.” 제2차 당포, 당항포 등 네 곳의 승첩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진중 보고서 ‘임진장초’에 있는 내용이다. 한 번 승리나 우월적 위치에서의 방만함과 나태함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2017년 12월 러시아 연방정부는 연방해운법을 개정해 러시아 관할권 내 북극항로를 통한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 에너지 운송에는 자국 국적 선박을 투입하도록 의무화했다. 또한 미국의 ‘조운스 액트’(JONES ACT)와 같이 해운조선산업 보호 육성의 일환으로 자국 내 조선소에서 건조된 선박에 한해 항행을 허가하는 입법을 검토하고 있다. 2000년 시작해 2012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된 러시아의 신동방정책과 에너지정책의 실크로드인 북극항로의 개발과 운항체계 준비가 가속화한다.
북극항로는 쇄빙선이 관건이다. 항행거리·기간은 유럽에서 수에즈운하, 말라카해협을 통과하는 남방항로의 2/3밖에 되지 않으나, 아직 동절기에는 쇄빙이 어려워 북극항로 운항이 불가하다. 쇄빙 LNG운반선 건조 선가는 일반 LNG운반선의 1.5배이며 쇄빙선박의 운항 효율을 위해 환적항만설비 투자도 필수적이다. 에너지 운반비용의 경제성과 운항 제약도 극복해야 한다. 많은 해운사가 관심을 갖지만 아직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러시아의 북극항로 개방과 에너지 전략에 따른 국내 조선사의 행보는 2009년 시작됐고, 최근 선박 수출 및 기술협력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14년 러시아에서 쇄빙 LNG운반선 15척을 수주해 인도를 완료한 D사를 비롯해, 2017년 H사는 LNG추진 유조선 건조를 위한 엔지니어링 합작회사 ‘즈베즈다-현대’와 기술협약을 했고, S사는 셔틀 탱커(SHUTTLE TANKER)건조를 위한 합작사를 설립했으며 2019년 아크틱 (ARCTIC) LNG-2 사업에 투입될 5척의 설계·구매, 블록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극동지역을 아시아 태평양진출을 위한 주요 공급 및 물류단지로 육성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가까운 발쇼이카멘의 즈베즈다조선소를 자국에서 생산된 에너지의 운반을 위한 특수선박을 건조·공급하는 북극항로 개방의 전진기지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러시아와 아태 지역을 잇는 조선산업의 중추 역할을 하는 조선클러스터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러시아는 군함 잠수함 항공모함 등을 만드는 고도의 건조 기술을 보유했지만, 현대화된 상용 선박 건조 기술은 미경험 분야여서 최고 경쟁력을 지닌 한국과 협력이 절실하다.
사실 러시아는 동방개발정책에 따라 일찍부터 한국과 조선기술 협력을 시도해왔다. 2009년 10월 국내 D사와 러시아 극동조선소(FESRC)는 조선협력사업에 대한 계약(MOA)을 맺었다. 2010년 6월 조선기술 협력을 위한 합작회사를 설립했고, 9월에는 즈베즈다조선소 시설 현대화를 위한 설계계약도 체결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러 상황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 간 기술협력은 진정성과 가치 균형이 핵심성공 요인이다. 기술 제공자는 분야별 소요 기술을 제대로 공급해야 하고, 기술 수급자는 전수(傳受)요건을 갖추고 관련 산업의 고용창출이 가능하도록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
조선산업은 자본·기술·노동 집약적이며, 복합조립산업이기에 자본·기술·인력의 협업이 기본이며,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소 안과 밖의 협력이 필요한 일을 잘 조화시켜야 경쟁력과 수급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조선산업 클러스터 조성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과 러시아는 다양한 분야 경제협력 의향을 상호 타진해왔다. 조선산업도 그런 세월이 12년 흘렀다. 서로의 니즈(Needs)를 경청하고 역량을 집중해 실질적 성과를 창출할 때가 왔다. 북극항로 개방을 향한 대형 플라이휠은 돌기 시작했다.
국내 대형 조선 3사는 러시아 조선소와 기술 협력 계약을 체결했거나 진행 중이다. 러시아의 북극항로 및 극동지역 개발계획과 한국의 조선기술, 지정학적 위치가 맞물려 쌍방의 성과를 최대로 창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시작할 때의 각오와 자세, 전략적 목표, 공식·비공식 약속들을 진정으로 한결같이 실행할 때 더 큰 신뢰와 경제엔진을 품은 새로운 시작이 이어질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말씀을 다시 새겨 본다. 종시여일(終始如一).
전 대우조선해양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