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의 창궐로 숨죽이고 있는 사이 봄은 찬란한 꽃을 피우며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다. 아카시아꽃과 이팝나무, 조팝나무 꽃이 지고 나니 탐스럽게 핀 장미꽃이 여름을 손짓하며 봄을 마무리한다.
 |
| 5월에 돋보이는 꽃 ‘장미’. |
5월 이맘때 쯤 장미꽃이 돋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옛날 부산엔 요즘같은 아파트는 거의 없었고, 언덕이 많은 도시답게 축대를 높이 쌓은 담이 있는 주택이 많았다. 오래된 일본 적산가옥과 당시 유행하던 2층 양옥집이 뽐내던 시절이었다.
높은 담엔 5월이면 장미가 줄지어 피었는데, 그 골목길을 지나칠 때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걸음을 멈추곤 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비롯해 바다르 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 와이만의 ‘은파’ 등 주옥같은 피아노 음악이 장미꽃과 어울려 더없이 아름답게 들렸다. 세월이 흘러 요즈음은 필자가 사는 동네 앞 유엔평화공원을 산책하며 담벼락에 길게 줄지어 늘어선 장미 넝쿨을 보며 당시를 회상한다.
학창 시절엔 장미꽃과 피아노음악이 좋았지만, 지금은 장미꽃길을 지날 때면 하프 음악을 떠올리곤 한다. 장미꽃과 하프, 참으로 어울리는 조합이다. 하프는 오케스트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악기지만, 소수의 교향곡과 실내악 말고는 사용되는 빈도가 적다. 그러나 영롱한 하프 소리에 한 번 매료되면 천국의 화원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 3악장 참조)
 |
| 하프 음악을 담은 음반. |
하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악기 중 하나로 문자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하프는 수렵시대에 쓰였던 활에서 시작했는데, 활의 줄을 튕기면 부드러운 소리가 나는 원리에서 비롯되었다. 서기전 3000년께 비스마야의 화병에도 하프 모양이 그려져 있고, 대영박물관에 있는 들소 그림에도 하프가 등장한다. 서기전 2500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그리스에는 ‘리라’라는 수금이 있었으나 음량도 적고 반음도 낼 수 없는 단순한 형태의 악기였다.
그 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모양도 바뀌었고 소리도 점점 개량됐다. 오늘날 쓰이는 현대적인 하프는 1810년께 프랑스의 악기 제작자 에라르가 완전한 겹 페달 하프를 만들면서 시작됐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프 음악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하프 음악으로는 19세기 프랑스 작곡가 프랑수아-아드리앙 부엘듀의 하프 협주곡, 헨델의 하프 협주곡, 쉬포어의 하프 변주곡, 뒤셀도르프의 하프 협주곡 등 명곡이 있다. 연주자로는 스페인 출 니카노르 자발레타, 마리사 로블레스 등이 손꼽힌다.
필하모니 대표·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