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그의 기일을 맞이한다. 뜻하지 않은 바이러스 창궐로 온 세계가 뒤숭숭 하지만 그래도 그가 남겨두고 떠난 이 나라는 방역 잘한다는 칭찬도 듣고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경제 전망도 그리 나쁘지 않다.
특히나 피부에 와 닿는 전쟁 위기설로 흉흉했던 시기도 그럭저럭 넘기고 이제 북한과 어떻게 교류를 재개하느냐 하는 타이밍만 엿보고 있는 중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실 수 있다면 흐뭇한 웃음을 짓고 계시지 않을까.
식민 강점과 남북 전쟁으로 워낙 결딴이 났던 나라에서 살아온 터라 우리들은 매사 ‘죽겠다’를 입에 달고 살아간다. 늘 위기고 언제나 대형사건 사고에 분열과 갈등으로 들끓는 냄비 속 같다.
지옥 같은 무한 경쟁 사회에 신분 변동의 사다리는 걷어차이고, 아이들은 태어나지 않고, 노후는 막막하다. 와우! 한국이 죽고 못 살 나라라고 외치는 레퍼토리는 수백 수천 가지여서 그 ‘죽겠다’는 노랫가락은 무한 반복 테이프처럼 돌고 돌고 또 돌아간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한국이 국제 비교 속에서 그래도 꽤 살 만한 나라라는 수치 증거는 차고 넘친다.
실제로 방금 ‘죽겠다’ 푸념하던 사람이 차 바꾼 얘기, 해외여행 추억담, 주말 레저 계획으로 수다를 떨어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자기를 갉아먹으며 도통 발전이 없는 태도가 ‘습관적 사고로 살아가는 것’인데 한국인 대다수의 이 ‘죽겠다’는 습관적 사고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전혀 죽을 만하지 않은데도 죽겠다, 죽겠다 외치니 말이다.
노무현. 그는 역사상 가장 시끄러운 대통령이었다. 그이가 시끄러웠다는 뜻이 아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구호에 걸맞게 그가 재임하는 동안 온 세상 사람이 너나없이 나서서 자기 주장들을 했다. 사실, 노 대통령 이전까지는 일반 국민이 국정에 그처럼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풍토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토론을 반기고 권장했고, 국민은 이전과는 달리 대통령을 만만하게 보며 너도나도 목청을 높였다.
그는 재임 내내 온갖 비난의 화살을 맞았건만, 퇴임 때 모습은 너무도 홀가분하고 행복해 보였다. 설사 결과가 흡족하지 못했어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하는 자부심 때문이리라. 그는 뜻대로 김해 봉하마을에서 생태농사를 지으며 평온한 노후를 보냈어야 했다. 그렇게 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황망히 그이를 보내면서 정말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 했던 많은 사람이 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의 피맺힌 집단 통곡은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것이다.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진정, 그의 간절함을 알았던 사람들이 느꼈던 뼈저린 후회와 미안함과 안타까움의 눈물이었다.
그 눈물이 내를 지나 강을 이루고 해일처럼 밀려와 마침내 후계 정권을 탄생시켰고, 또다시 기일을 맞이한다. 거듭 떠올려 보지만, 그이는 자신의 후계 대통령 문재인에게 수고한다, 잘하고 있다 만족의 인사를 보낼 것 같다.
자기를 사랑한 국민에게도 이제는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너그러운 웃음을 보낼 것도 같다.
이명박, 박근혜 시기를 통상적인 진보 인사들처럼 비난하지 않고자 나는 노력한다. 그들 나름의 명확한 국정철학이 있었다. 다만 그들은 시대를 잘못 짚은 우둔한 지도자들이었다. 더 이상 격차가 심화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사회 동향을 시장주의자 이명박은 읽지 못했다.
아버지의 나라를 재건하고 싶어한 국가주의자 박근혜는 사고가 1970년대에서 멈춰버린 듯했다. 그들은 노무현에게서 배웠어야만 했다. 권력과 금력 대신 시민사회 구성원의 권리의식, 책임의식이 나라의 근간이 되도록 이끄는 일 말이다.
바로 지금 그같은 노무현의 꿈이 관철되는 과정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노무현의 꿈은 그 누가 특별히 선양하지 않아도 사람들 가슴 속에 각인되어 영원할 것 같다. 5년의 길지 않은 재임 기간을 통해 그는 공화정의 시민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씨앗을 뿌려놓았다. 그것은 선진국 대한민국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는 진정 구시대의 막내가 아니라 새 시대의 첫째였다.
그가 그립다.
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