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기념할 일이 있으신가 봐요?” 미리 주문한 붉은 장미 100송이를 건네며 꽃집 주인이 환하게 웃는다. “엄마에게 드리려고요.” 놀라는 표정이 한참동안 내 뒤를 따라 온다.
연두와 초록이 어우러진 오월이다. 길거리와 산에는 흰 꽃들이 많이 보인다. 조팝꽃과 찔레꽃, 아카시아가 지고 이제 이팝나무와 산딸나무, 때죽나무가 흰 꽃을 피워 세상이 하얀 등을 단 것처럼 환하다.
시야를 조금 내 쪽으로 당겨보면 그 싱그러움 사이에 붉은 점들이 촘촘하다. 아파트 입구에도 학교 담장에도 가정집 담벼락에도 덩굴장미가 활짝 피었다. 내가 한아름 안고 있는 붉은 장미에 비하면 덩굴장미는 오히려 수수하다. 꽃대가 가지런하지도 않고 제 맘대로 늘어졌다. 꽃송이도 작은 편이다. 그러나 향기는 멀리서도 벌과 나비를 부르고 지나가는 사람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오늘 들른 꽃시장에는 온갖 색깔의 장미가 황홀하다. 아시아가 원산지인 야생 장미를 인공으로 교잡하여 만들어낸 원예종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장미의 수가 600여종이라고 하니 장미는 꽃 중에서 가장 다양한 색깔과 모양으로 변화하고 있다
찔레꽃, 해당화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야생 장미라 한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에도 장미라는 단어가 등장하니 우리나라에 장미가 피고 진 것도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장미가 우리 곁에서 사랑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성에게 바치는 최고의 꽃으로 장미를 꼽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많은 장미 품종이 있음에도 품종이 매년 개량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미를 사랑한 릴케는 그의 묘비명처럼 “겹겹이 싸인 눈꺼풀들 속/ 익명의 잠”에 빠져 있을까?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 ‘에밀리에게 장미를(A Rose For Emily)’에서 장미는 에밀리에게 애도와 위로가 될까? 호메로스는 어떤 영감으로 ‘장미빛 손가락의 새벽 여신’이라는 구절을 만들었을까? 이 많은 의문들은 장미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상징하는 베르사유의 장미와 두 가문의 장미 문양 때문에 이름 지어진 장미전쟁도 장미의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다. 그 아름다움은 화려하고 풍성하고도 진하다.
덩굴장미 만발한 오월, 덩굴장미에서 엄마를 읽는다. 그러나 장미는 내게는 특별히 아버지로 먼저 다가온다. 아버지는 장미에 접을 붙여서 온갖 색깔의 장미를 넓은 마당에 꽃피우셨다. 지나가던 사람이 오월이 되면 우리 집 장미를 구경한다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엄마와 우리 자매들은 불만이었다. 장미에만 빠져 있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장미 속의 가시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엄마는 장미를 한 그루도 가져오지 않으셨다. 그 이후로도 엄마는 장미가 싫다고 하셨다.
그런데 올해 구순을 맞는 엄마의 마당에서 키 낮은 장미 한 송이를 발견했다. “이제 나도 너거 아부지 보러 갈 날이 다 되었나 보다. 그 싫던 장미가 이쁘네” 작년에 조카가 화분에 심은 장미를 들고 왔는데 마당에 심어두었더니 올해 꽃이 핀다고 하시며 엷은 미소를 짓는 엄마의 모습이 장미처럼 곱다.
“장미꽃 넌출넌출/ 고개를 내밀고 있다// 텅 빈 집 누가 올까/ 가시로 울을 치고// 뜰 안을/ 넘보던 햇빛/ 숨죽이는 한낮에// 한때는 울 엄마도/ 불꽃 같은 장미였다// 한 잎 한 잎 눈부셨던/ 빨간 루주 꽃잎 입술// 바람이/ 다 훔쳐 가고/ 휘인 등뼈 가시만// (김정 ‘장미꽃 엄마’)”
엄마도 아버지에게 한때는 어여쁜 장미였을 것이다. 장미를 가꾸고 화폭에 그 모습을 담던 아버지의 예술적 고독이 장미처럼 붉었으리라. 우리에게 엄마는 영원한 장미이다. “빨간 루주 꽃잎 입술”은 바람인 자식들로 인해 다 지워지고 “휘인 등뼈 가시”만 남았다 하더라도 엄마는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또 해마다 용기 내어 환하고 붉게 웃어주는 장미이다. 집 울타리에 점점이 핀 덩굴장미는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더욱 붉고 애틋하다.
“밤새 한 걱정인가,/ 담벼락이 온통 붉다// 흘림체로 번져있는 글자 이어 붙이면//어머니/ 생전 잔소리/ 만져질 듯 생생하다// (황외순 ‘장미’)”
‘담벼락이 온통 붉은’ 엄마의 잔소리를 지금도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그 생생한 잔소리를 더 오래 건강하게 듣고 싶어 100송이 붉은 장미를 안고 엄마에게 가는 오월, 따뜻한 바람 한줄기 장미 꽃잎에 앉는다.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