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했다. 초록이 무성해진 5월은 산들바람이 불어 들고, 춥지도 덥지도 않아 야외활동의 적정기다. 코로나가 잦아들며 찾아온 이 5월의 향유와 즐김은 시민에겐 잃어버린 3개월에 대한 보상과도 같았다. 나도 그랬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을 핑계 삼아 틈만 나면 뛰쳐나갔다. 그럼에도 코로나가 두려운 나머지 멀리 가진 못하고 부산 기장의 해안길을 빙빙 돌았다.
 |
| 그림 서상균 |
죽성항에서 월전을 지나 대변항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은 부산에서 동해바다를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바닷길이다. 중간중간 넓고 높은 명당자리를 독차지해 버린 갖가지 시설 때문에 사람들은 해변으로 몰린다. 송정 근처에 접어들면 도로가 몸살을 앓는다. 청사포는 들어가기조차 무섭다. 해안길이 가진 한정된 공급을 수요가 넘어 버린 것이다. 앞으로도 수요는 절대 줄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시민은 갖가지 목적으로 기장지역을 찾는다. 사고, 먹기 위함이 가장 앞서겠지만, 언제나 정겨운 포구와 확 트인 바다 구경이 한몫을 한다. 나에게 기장의 최고 매력은 ‘포구 마실’이다. 포구는 바다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바다를 가장 멀리 볼 수 있는 곳이다. 자연과 인간의 사이에서 뭔지 모를 진실함이 오롯이 남아있는 그런 곳이다.
포구의 큰 사이즈인 항구와 항만은 시대 변화에 따라 여러 목적으로 변화를 거듭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을 댈수록 전국 항구와 항만은 바다와 접한 그저 그런 도시지역으로 변해간다. 감동 없음을 넘어 난개발 현장이 되곤 한다. 포구를 이들과 직접 견줄 수는 없지만, 그 처지는 그리 달라 보이질 않는다.
언젠가 부산의 옛 지도를 놓고 기장에서 가덕도까지 포구를 세어 보았다. 자그마치 80개가 넘었다. 이참에 인터넷에 지도를 켜 놓고 다시 세어본다.
월내 임랑 문동 칠암 동백 이동 이천 일광 학리 죽성 월전 대변 연화리 동암 공수 송정 구덕포 청사포 미포 우동 민락 남천 섭자리 백운포 용당 감만 하리 중리 송도 감천 다대포 홍티 보덕포 하단 감동진 대저 명지 눌차 새바지 외항포 대항 천성까지.
미포를 지나면서 세는 것에 급격히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도 40곳이 족히 넘는다. 조건은 모두 다르지만 분명한 존재이유가 있기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돈에 눌리고 무지에 밀려 이미 사라진 포구들과 포구다움을 잃어버렸거나 훼손 중인 곳을 제외하면 포구다운 포구는 열 손가락 안쪽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포구는 사라지고 있다.
부산은 동래에서 시작했다지만, 해양도시이자 국제물류도시인 부산의 원형 공간은 ‘부산포’라 여겨진다. 약 110년 전 부산포에 경부철로를 관통시켜 포구를 두 동강 내버리고 결국 매립해 버렸던 일제의 횡포에 뒤늦은 분개도 해보지만, 매립 뒤 부산포 일대의 변화 앞에서 ‘부산포 복원’을 꺼낼 수도 없는 것이 우리 처지가 되어버렸다. 바다 덕분에 성장했고 바다 때문에 먹고 살아가는 해양도시에서, 그것도 바다를 미래 주인공으로 삼겠다는 도시에서 그 존립의 중심인 원형 공간의 회복에 대한 논의를 시작도 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수년 전 ‘어업유산’이란 말이 등장했다. ‘어업’과 ‘유산’이 만났으니 금세 짐작이 간다.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전통적 어업 활동과 어업 생태계, 해양경관과 해양문화를 통칭하여 유산이라 하는 것이다. 제1호 국가중요어업유산은 제주의 해녀어업이다. 2호는 꼬막을 잡는 보성의 뻘배어업, 3호는 남해의 죽방렴어업이다. 그 뒤로 신안의 갯벌천일염업, 완도의 지주식 김양식어업, 무안·신안의 갯벌낙지 맨손어업, 하동·광양의 섬진강 재첩잡이 손틀어업이 이어진다. 올 6월에는 통영·거제의 견내량 돌미역 틀잇대 재취어업이 유산 등록을 기다리고 있다.
자료를 뒤적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견내량 돌미역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등장했다지 않는가. 1594년(갑오년) 3월 23일 자와 24일 자 일기에 몸이 불편하던 장군을 부하들(방답 첨사, 흥양 현감, 조방장 등)이 문안하며 견내량에서 미역을 캐 왔다고 적혀있다. 부산에는 이러한 전통어업이 없는가? 영도를 중심으로 해안 전역에서 아직도 수백의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다. 낙동강 재첩은 한때 우리나라 최고 상품이었고, 기장 멸치와 미역도 국가의 각종 수산 기록지에 반드시 등장한다. 가덕도 대항마을의 숭어들이는 또 어떤가. 그런데 모두 이류 이하로 전락했거나 힘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어업유산 외에 부산 포구에 어울리는 또 다른 개념은 없을까? ‘어촌유산’은 어떨까? 어촌유산은 전통어업의 전승을 핵심으로 여기는 어업유산보다는 어부들의 삶과 포구의 진정어린 모습을 더 강조한다. 여러 여건으로 보아 부산은 어업유산보다 어촌유산이 더 어울려 보인다. 유산이란 말에 겁낼 필요는 없다. 문화재 얘기가 아니다. 제대로 된 어촌의 삶을 유산이라 부르는 것이다. 21세기는 진정성의 시대다. ‘포구의 진정성?’ 그것은 포구의 생명 같은 깨끗한 바다와 건강한 물고기, 소박하고 변치 않는 포구다움, 그리고 행복한 어촌 사람에서 출발한다. 절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파도 바람 햇살 등과의 조화로움을 엮어내는 포구의 라이프 스타일 모두가 어촌유산이다.
마침 해양수산부에서 ‘어촌 뉴딜300’ 사업을 시작했다. 부산에서는 대항, 하단, 하리, 청사포가 대상지로 선정됐다. 사업 목적과 선정 이유를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걱정도 앞선다. 선정된 포구들이 이미 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고 또 여러 개발사업과 연계돼 있어 올바른 미래화의 선택에 제약이 너무 많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네 곳만 바라보아야 하는 상황도 걱정이다. 이웃한 포구, 연결되는 해안선과 배후 지역을 아우르고 묶어내지 못한다면 의미 없이 지나가는, 아니 그나마 남아있던 포구다움마저 훼손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사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응원하고 싶다. 지속가능한 포구! 이곳들이 부산의 원형 공간인 포구의 진정한 부활의 시작점이 되어 주길.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