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전 물에 불린 미역이 넘쳐나려 한다.

냉장고를 뒤지니 소고기가 없다. 대신 대패삼겹살 조금과 대합과 새우 등이 있다. 소설가 길남 씨는 고개를 끄덕인다. 시계를 얼핏 보니 시침이 밤 12시를 넘긴 시각이다. 솥을 쓸까 큰 냄비를 쓸까 고민하는데 “오빠, 지금 뭐하는데? 내 지금 잘 거다”하는 소리가 소파에서 들린다.

“내일 마트에서 풀로 일하면 밤 11시나 돼서 들어올 낀데.”

길남 씨는 퉁명스레 대답하며 칼질을 시작한다.

부부는 공교롭게도 같은 달 생일이다. 길남 씨의 생일은 어버이날과 겹친 데다 오늘과 마찬가지로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마트의 종일 근무날이었다. 그는 일 마치고 온 생일날 밤 11시에 미역국과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대접받았었다. 하지만 괜히 심통이 났다. 생일날 하루 종일 생활전선에서 부대꼈던 스트레스를 가만 두지 못했던 것이다. 늦었지만 잘 퍼먹고 인기 드라마 ‘부부의 세계’까지 시청했지만, 결국 요망한 세치 혀를 마음대로 놀린 그는 부부싸움 단계를 1등급으로 격상시켰었다.

길남 씨는 지나간 악행을 반성하며 큰 솥을 선택한다. 아무래도 생일인데 푸짐한 게 좋다. 달궈진 솥에 참기름을 듬뿍 붓고 돼지고기를 넣는다. 소고기가 아님을 아쉬워하면서도 조선간장에 잘 볶으면 훨씬 감칠맛이 났음을 떠올린다.

치이이익! 소리가 잦아들 즈음 불린 미역을 그득 부어 다시 한 번 잘 볶는다. 볶는다기보다 미역을 익히는 과정에서 대합과 새우를 넣고 휘휘 저어준다. 물기가 졸았을 무렵 국물이 될 물을 한 바가지 부어준다. 이제 끓기만을 기다릴 뿐.

소설가 길남 씨는 무척 힘든 하루를 보냈었다. 간만에 날아온 원고청탁이 있어 그는 최근 본업에 충실코자 노력했었다. 마트 근무까지 빼가며 취재에 힘을 쏟았던 그였다. (물론 그 빈자리는 모두 아내의 몫으로 돌아갔음을….)

이날은 원고를 쓰기 위한 취재와 관련해 현지주민 협의체와 자문회의를 가졌는데, 길남 씨는 이 프로젝트가 현장과 소통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시작한 것임을 그 자리에서 깨닫고 말았다.

기획 전반을 진행하면서 주민의 생각을 반영하고 지역 실정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에 해당한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런 분야의 일에 관심이 많은 현지 주민이 느끼기엔 소설가 길남 씨가 기본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철없는 글쟁이로 여겨졌음이 분명한 자리였다. 가장 주의를 기울이고자 했던 부분이지만, 다시 한 번 배움의 기회로 삼을 수밖에….

길남 씨는 화끈거렸던 스트레스를 괜스레 집에서 표출했다. 뭐 천사표도 아닌 아내가 생일을 앞둔 날 가만있을 리 없었다. 장난 반 진짜 반으로 몸싸움을 하던 중 아내의 일격에 안경테가 부러지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길남 씨는 분기탱천해 또 요망한 세치 혀를 마구 놀리며 아내에게 덤벼들었었다.

사실 스트레스의 요인 중에는 내일 하루 종일 마트에서 일해야 하는 부분이 30%는 넘을 것이다. 길남 씨는 부러진 안경테를 순간접착제로 붙이면서 또 다시 자신을 반성한다. 모자란 글쟁이도 모자라 모자란 가장에 모자란 남편, 그리고 이 어려운 때에 일거리가 있음을 고마워하지 않았던 ‘모지래이’ 족발가게 바지 사장을 반성한다.

“그래, 내일은 마트 근무날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날인기야!”

길남 씨는 그래서 밤 12시에 미역국을 끓여 바친다. 삶에 지쳐 소파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내를 억지로 깨워서는 말이다.

후루룩! 그녀가 미역국을 한 입 맛보는 소리이다. 야들한 미역에 다진 고기와 쫄깃한 조개가 함께 씹힌다. 두 번째 숟가락질은 구수하면서도 시원한 국물을 새우와 함께 떠올릴 것이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아내가 딸에게 매일 해주는 말을 모자란 길남 씨가 아내에게 우물거리며 바치는 중이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