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가 아름다운 계절이다. 장미 하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생각난다. 릴케는 장미를 키우기도 했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에게 장미를 꺾어주려다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은 시인이다. 릴케의 묘비명에는 “오오, 장미여! 순수한 모순의 꽃, 꽃잎과 꽃잎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눈꺼풀 같구나. 이제는 누구의 꿈도 아닌 단단한 잠을 꼭 싸고 있구나. 그 가엾음이여!”라고 씌어있다. 릴케의 인생은 장미, 그리고 루 살로메를 비롯한 여러 여성과의 인연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비단 릴케만 장미와 여성을 좋아했을까?
남성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장미와 여성이 아닐까 한다. 나 또한 한 여성을 사랑하여 장미꽃 한 아름을 바치고 지금까지 한집에서 살고 있다. 아내는 가끔 경단녀(經斷女)라고 했다. 경단녀는 ‘경력 단절 여성’을 줄여 이르는 말이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싫어할 줄임말 신조어 같다. 싫어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파생한 언어이니 이해를 구해 본다.
아내는 1980년대 후반까지 부산의 신발 산업을 이끌었던 어느 회사의 연구실 직원으로 일을 해왔다. 그 당시 대부분의 여성이 그랬듯이 결혼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아이를 둘 낳고 작은 애가 초등학교 갈 때까지 살림하는 전업주부로 살았다. 신랑의 박봉으로 아이 둘을 키우기 힘들 때는 남모르게 친정어머니를 찾아가 손을 벌려 살림에 보태기도 했다고 한다.
출가외인으로 장모께 마냥 손을 벌릴 수 없는 입장이 되자 아이들 교육비에 보태려고 아내는 일을 찾아 나섰다. 처음 한 일은 위인전 외판원이었다. 이 일을 하며 아내는 단절된 경력을 이었다. 세월이 조금 지나 책을 사줄 만한 사람이 줄어들자 아내는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었다. 이 일이 교육비에 보탬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의 소개로 선거 부정 감시단 일을 하며 아내는 다시 경력을 이었다. 선거 부정행위를 적발하고 위법사항을 감시하는 일을 수년 동안 해왔지만 선거철에만 일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모집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아내는 초등학교 방과후교실 교사 자격을 갖추어 다시 경력을 이었다. 그 일도 몇 년을 하다가 학교의 형편과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시작하고 그만둔 일이 비단 그 일 뿐이었겠는가? 자잘한 일자리까지 셈하면 장미 꽃잎보다 적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하던 일이 없어지고 나서는 일을 하고 싶어도 자리가 없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아내는 우울해 하였다. 그 와중에도 일자리를 찾았지만 중년 여성에게까지 돌아갈 일자리는 거의 없었다. 활달한 성격임에도 많이 우울한 것 같았다.
보다 못해 내가 나서서 아내의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마침 친한 후배가 일자리를 소개했다.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최저시급을 받는 힘든 일이지만 무슨 일이든 하고자 했기에 아내는 즐겁게 일하고 있다. 아내가 우울해하지 않아서 좋다.
아내가 일하기 때문에 피곤한 점도 더러 있다. 앉아 있을 때보다 서 있을 때가 많다며 팔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할 때도 있고, 퇴근이 늦을 때는 분리수거를 해달라고 할 때도 있다. 집 청소까지 자주 맡겨서 좀 성가시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아내는 월급을 받으면 나에게 약간의 용돈을 주기도 한다. 우리는 집안일을 조금씩 나눠서 해가며 살아온 셈이다.
아내는 단절된 경력을 장미 꽃잎처럼 겹겹이 겹치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경력단절 여성이 몇 백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서글픈 현실이다. 재취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여성에게 국가에서 조금만 더 관심 가져 일자리를 확보해 준다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이 여성들이 가진 우수한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도 한때 경단녀였던 분이 있다. 그녀는 어린아이를 둘 키우면서도 탁월한 업무능력을 보이며 자신의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미는 꽃의 여왕이다. 여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릴케의 시에서처럼 꽃잎과 꽃잎이 겹으로 겹쳐져 누구의 잠을 꼭 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경단녀가 된 우리 주위의 많은 여성들처럼…. 릴케의 묘비명을 통해 경단녀를 떠올리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다. 그 무엇보다 화려한 경력으로 꽃잎을 대신하는 우리나라의 경단녀들이 장미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여성들이 재취업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