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수건이 울면 기분이 좋아진다. 감정이 풍부한 수건이다.” 왕가위 감독이 1994년 만든 영화 ‘중경삼림’에는 세기말적 감수성이 수채화처럼 스며 있다. 실연의 아픔과 고독, 새로운 만남을 찾아 헤매는 번민 등 불안한 청춘의 초상을 그리되, 톡톡 튀는 대사들에서 보듯 감정은 절제되어 있다. 시쳇말로 쿨하다. 그 동인은 자유다. ‘나뭇잎이 온통 갈색이에요/하늘은 잿빛이구요/어느 겨울날/캘리포니아에 대한 꿈을 꾸어요’.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자유의 갈구는 배경음악 ‘캘리포니아 드리밍’에서 증폭된다.
‘중경삼림’이 인상적인 건 세기말과 홍콩 반환이란 이중의 전환기가 풍경을 이루고 있어서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은 176년간의 영국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중국에 반환됐다. 2047년 7월 1일까지 50년간 홍콩 시민의 자치를 보장하고, 영국적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한다는 약속 아래서였다. 그래도 중국 정부를 믿지 못한 50만여 명의 시민이 홍콩을 떠났다. 그들의 선견지명을 칭찬해야 할까. 중국은 반환 23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홍콩보안법’을 만들어 홍콩 시민의 자유를 제한해버렸다. 앞으로 국가 분열, 국가 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국 세력과의 결탁 등 범죄를 저지르면 최고 무기징역형에 처해진다. 홍콩 독립운동을 벌여온 ‘데모시스토당’은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졌다”며 당을 해산했고, ‘홍콩독립연맹’은 해외로 근거지를 옮겼다.
우리 정치권의 일각에선 “국제사회가 홍콩보안법을 인권보호에 반하는 통제법이라고 비판한다”며 중국에 대한 비판 입장 표명을 정부에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도둑이 되레 매를 드는’ 꼴이다. 홍콩보안법 못지 않게 시민의 자유를 구속하는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존치를 주장하는 모순을 보여서다. “알리와 포먼이 권투시합을 한다. 나는 알리를 응원하는데, 김일성도 알리를 응원한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빨갱이인가?” 국가보안법의 부조리는 영화 ‘변호인’의 대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 현대사의 독재정권들은 국가보안법으로 시민의 자유를 억눌러 영구집권을 꾀했다.
북한 또한 “홍콩 특별행정구의 법률제도 및 집행체제(홍콩보안법)를 수립한 중국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독재 마인드는 여전하다. 중국 정부를 비판하기에 앞서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홍콩은 우리의 거울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