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의 유럽. 당시 유럽 주요 도시와 관광지에는 배낭여행 온 한국인으로 가득했다. 이들이 반드시 찾는 음식점 가운데 ‘웡케이(Wong Kei)’가 있었다. 영국 런던 차이나타운에 있는 웡케이는 세계에서 가장 불친절한 음식점으로 악명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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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km 상공에서 볶은고추장에 비벼먹는 밥은 대체 불가한 맛이다. |
그럼에도 한국 여행객의 발길이 이어진 것은 달걀볶음밥(Egg Fried Rice) 때문이다. 찰기가 있는 자포니카 계열 쌀밥에 달걀을 풀어서 볶은, 말 그대로 달걀볶음밥이었다. 요리와 함께 시키는 이 사이드메뉴를 가난한 한국 여행객은 단품으로 주문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유럽으로 오는 국적 항공사 기내에서 챙긴 볶은고추장 덕분이었다. 달걀볶음밥에 볶은고추장을 뿌려 비벼 먹는 그 맛은 유럽에서 먹는 최고의 끼니였다. 상대적으로 항공료가 비싼데도 굳이 국적기를 탄 데는 튜브에 든 볶은고추장을 충분히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고추장은 고추를 발효해서 만든 소스 가운데서도 독특한 면이 있다. 기원전 8000~7000년부터 페루 산악지대에서 재배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추는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덕분에 세계 시장에 데뷔한다. 콜럼버스는 ‘후추보다 좋은 향신료’라고 강변했지만, 유럽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고추의 가치를 ‘발견’한 곳은 3세기쯤 지난 동아시아였다. 한국, 중국, 일본은 각각 고추를 발효해 고추장, 두반장, 유즈코쇼를 개발했다. 두반장은 콩과 누에콩을 섞어 발효한 것에 붉은 고추와 소금 등을 섞어 만든다. 처음엔 매운맛이 강하지만, 콩 단백질의 발효로 시간이 갈수록 감칠맛이 더해진다. 유즈코쇼는 유자와 고추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 만든다. 고추의 칼칼한 매운맛에 유자의 풍미가 곁들여져 다양한 조미료로 활용된다. 고추장은 메줏가루 고춧가루 소금이 들어가는 것은 두반장과 비슷한데 여기에 찹쌀 멥쌀 보리 밀 등 곡물과 엿기름을 더한다. 덕분에 두반장의 감칠맛, 유즈코쇼의 매운맛에 단맛까지 더해졌다. 매운맛, 감칠맛, 단맛의 조합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의 미각을 지배한다.
역사적으로 이 조합에 가장 먼저 매료된 이는 영조 임금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44년 7월 28일 기사에서 임금은 도제조 김양택에게 말한다. “송이, 생복, 아치, 고초장 이 네 가지 맛이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이로써 보면 입맛이 영구히 늙은 것이 아니다.” 말인즉슨 일흔다섯 늙은 나이임에도 송이버섯, 날전복, 새끼 꿩, 고추장만 있으면 밥을 잘 먹으니 내 입맛이 아주 무뎌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항공사에서 볶음고추장을 기내식으로 낸 것은 1991년부터다. 기내식은 보통 고도 10㎞ 안팎으로 비행할 때 나온다. 이 정도 고도에서는 기압, 습도, 소음 등이 평소와 달라 미각에 변화가 오고 특히 단맛과 짠맛에 둔감해진다. 비행기에서 먹는 볶음고추장이 특히 맛있는 이유다. 해외여행을 못 하니 다른 건 별로 아쉽지 않은데 고추장 뿌려 먹는 기내식이 가끔 생각난다. 비행기를 안 타고는 해발 고도 10㎞에서 고추장을 먹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박상현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