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부산국제영화제(BIFF) 취재 현장에서 네덜란드 출신 영화비평가를 만났을 때 일이다. 한국 영화인과의 인맥, 유럽인이 바라보는 한국 영화 등을 인터뷰하려고 수첩과 볼펜을 꺼내는데 대뜸 그가 물었다. “녹음은 안 합니까. 불완전한 기록과 기억에만 의존하는 기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개인의 차이인지 문화의 차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을 취재하면서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지금 녹음되는 거 아니죠”이다. ‘오프 더 레코드’ 상태에서는 속에 감춘 말을 비교적 쉽게 꺼내지만 녹음은 굉장히 부담스러워한다. 한국 언론에 익명 취재원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정작 우리나라 법은 녹음에 관대한 편이다. 녹음의 주체가 대화의 주체로 참여하는 상황이라면 상대방의 동의없이 녹음하는 게 가능하다. 통신비밀보호법은 제3자의 녹음 행위만 처벌하기 때문이다. 영국 캐나다 덴마크 등이 우리와 비슷하다. 독일 프랑스 호주 등에서는 동의 없는 녹음이 불법이다. 미국은 주마다 법이 다르다. 개인정보보호에 엄격한 아이폰에는 일반 음성녹음 기능은 있으나 통화중 녹음 기능은 없다. “몰래 녹음은 옳지 않다”는 고 스티브 잡스의 지론 때문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나 LG전자는 통화중 녹음이 가능한 내수용과 이 기능을 뺀 수출용을 따로 만든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녹음과 녹취록에는 사실을 웅변하는 힘이 있다.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당시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의 휴대전화 2대에서 발견된 녹음파일 236개는 게이트를 입증한 결정적 단서였다. 요즘 수사가 한창인 ‘검언 유착 의혹’ 사건에도 녹취록이 등장한다. 한 언론은 검사장급 검사와 방송기자가 현 여권 인사를 옭아매기 위해 공모한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지만 녹음 원본이 공개되자 주장에 힘이 빠졌다. 고 최숙현 트라이애슬론 선수는 팀 내 가혹행위를 못 이겨 세상을 등졌다. 대신 그녀가 평소 모아둔 녹음파일에 사건의 정황을 남겨둔 채였다.
요즘은 고위 공직자나 기업 임원들의 사적 모임에서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간 이상한 사람 취급당한다고 한다. 휴대전화를 윗옷에 넣어 다른 방에 두거나 아예 차에 놓고 내리는 게 매너로 통한다. 녹음기를 타고 나오는 생생한 목소리 덕분에 누군가는 누명을 벗기도 하고 누군가는 발목을 잡히기도 한다. 신뢰가 허물어진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원칙은 있다. 남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라면 뒤에서도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