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전 국민의 가슴에 큰 생채기를 남기고 꽃다운 22살에 생을 마감한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경기) 최숙현 선수의 몹쓸(?) 유언이다. 까르르 웃고 떠들기에도 바쁜 20대. 죽음을 생각하고 생을 마감하면서까지 살아있는 우리에게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 겨우 자기를 구타하고 괴롭힌 감독 선배 팀닥터의 악행을 고발하고 처벌하려고 쇠심줄 같은 목숨을 끊진 않았을 것이다. 가해자 처벌은 물론 철석같이 믿고 의지한 우리 사회와 체육계한테도 책임을 묻고 싶었을 것이다.
체육계 입장에서 최 선수의 죽음은 코로나19 사태에 버금가는 미증유의 사건임엔 틀림없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듯 체육계에서는 최 선수의 죽음 전에도 충격적인 사건은 늘 있었다. 다만 최 선수의 죽음이 과거 여느 사건과는 양과 질적 측면에서 확연히 달랐다는 점이다. 한솥밥을 먹는 제자, 후배에게 어떻게 저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싶을 정도로 끔찍하고 가학적이었다. 국민의 공분을 넘어 대통령까지 철저한 원인 규명과 대책을 마련하라 지시하고, 야당의 한 의원은 의원직 명예를 걸고 ‘최숙현 법’을 제정하겠다고 호통치는 모습으로 최 선수 죽음의 충격을 가늠할 수 있다.
물론 2014년 한 태권도 선수 아버지가 심판의 편파판정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사건 때도 정부는 성폭력, 조직 사유화, 횡령·배임, 승부 조작을 스포츠 4대 악으로 규정하며 정부, 경찰, 검찰이 연계한 합동수사반 사무소를 개설한 적이 있다. 이후 또 다른 선수 폭행·성폭력 사건 땐 스포츠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켜 체육계 적폐를 청산하고 생태계를 갈아엎겠다고 팔을 걷어붙였지만 변죽만 울리다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코로나 전(BC, Before Corona)과 코로나 후(AC, After Corona)의 시대로 나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체육계도 최 선수의 사망 전과 후엔 뚜렷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라고 하면서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메리토크라시(능력주의)에서 디그노크라시(존엄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한국교육의 현실을 ‘경쟁 지상주의, 주입식 교육, 학력 계급사회, 승자 독식 사회’로 규정한다”며 “대학입시, 대학서열, 대학등록금, 특권학교 이 4가지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학자다.
이에 필자도 체육계에 최 선수 죽음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성적지상주의에 천착한 결과라고 진단 평가한다. 김 교수가 메리토크라시에서 디그노크라시로 전환하자 주장하는 까닭도 한국교육이 지난 100년간 메리토크라시에 방점을 두면서 교육의 황폐화 및 문제점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체육계도 지난 100년간 성적지상주의 패러다임이 절대 선인 것처럼 강조되면서 유도 왕기춘 선수 성폭력 사건,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의 선수 폭행·성폭력 사건, 역도 사재혁 선수의 후배 폭행 사건, 심지어 최 선수의 사망과 같은 슬픈 사건이 발생했다. 시대 정신과 가치를 외면하는 낡은 성적지상주의 패러다임을 폐기하지 않는 한 제2, 제3의 최 선수 같은 사건은 언제든 반복될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누가 한 사람 징계받고 사퇴한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대통령부터 일선 현장의 지도자까지 모든 국민이 뼈를 깎는 반성과 더불어 100년 동안 고수해 온 성적지상주의 패러다임의 문제점과 부작용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가능하다. 한국체육은 지난 100년간 성적지상주의 패러다임으로 세계 10대 스포츠 강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메달의 위세에 짓눌려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배려, 존중, 희생, 헌신, 노력, 협력, 매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메달 이상으로 아름답고 존엄한 가치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김 교수가 한국교육 100년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디그노크라시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듯 필자도 한국체육 100년의 문제점을 알기에 스포츠가치실천주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한다. 김 교수가 주장하는 디그노크라시와 스포츠가치실천주의는 단어만 다를 뿐 의미와 방향성은 같다고 본다. 미래는 변화시키는 사람이 차지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태동한 스포츠가치실천주의 패러다임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전 세계의 가치(표준)가 되길 희망해 본다.
동서대 체육학과 교수·전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