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는 기업 범죄다’ 시리즈를 본 ‘법잘알’ 지인이 문자를 보내왔다. 시리즈 마무리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도입 필요성을 내세웠는데, 불가능한 일 아니냐는 거였다. 요지는 이렇다. ‘하청 노동자가 죽는 건 분하지만, 직접 근로계약을 맺지 않은 원청 오너를 범죄자랍시고 세게 벌할 수 있는가. 행정으로 산재를 막을 방안을 고심해야 하는 시기에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닌가’. 몇 가지 대꾸하고 싶었지만, 당시 노동자의 중대 권리인 ‘휴가’를 이행 중이었던 탓에 응대하지 못했다. 뒤늦게나마 물음에 답하려 한다.
도구를 써서 사물을 제품이 되도록 만드는 일은 ‘언택트’가 불가능하다. 재택근무로는 아파트를 올리거나 선박을 건조하지 못한다. 훗날 3D 프린터가 건물을 짓는 시대가 온다 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 프린터 역시 누군가 손에 쥔 연장으로 쇳덩이를 기계로 바꾼 결과물이다. ‘기름밥’은 배달될 수 없다. 법도 행정도 못 바꿀 사실이다. 이런 탓에 각종 거리두기가 요란했던 올해도 노동자는 죽음으로부터 그리 먼 거리를 두지 못했다. 지난 반년 동안 노동자 1101명이 죽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 사망자 1115명과 다를 바 없다. 사고로 숨진 노동자는 올해 470명으로, 지난해 465명보다 오히려 늘었다. 부산 울산 경남에서도 올해 144명이 삶을 잃었다.
코로나라는 돌발변수에도 결과는 그대로다. 핵심적 요인은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다. 안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업, 범법자 사업주에게 ‘선처’를 안기는 법원, 사업주의 범죄를 ‘실수에 의한 것’으로 분류한 양형 체계가 여전히 노동자를 벼랑에 세운다. ‘중층적 도급관계’ 가장 아래에 있는 하청·비정규직·단기 노동자는 어떤가. “도대체 누구의 지시에 따라 작업하고, 누구로부터 안전 조치를 받아야 하는지(부산 동부지원 2018고합115 판결)”조차 알지 못한 채 수 백m 상공을 올라야 한다.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언제 추락사할지 모를 ‘죽기 직전의 삶’을 이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이 죽어간다, 더는 손 놓고 있지 마라, 그건 살인이다”고 ‘호들갑스럽게’ 소리치는 것이다. 소란이라도 피우지 않으면 어느 법률가가 이론적 반박의 여지가 없는 법안을 고안하고, 어느 행정가가 실질적으로 산재를 예방할 제도를 설계할 마음을 품겠나. 더 호들갑 떨고, 더 소란스럽게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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