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 28조’로 잘 알려진 최승로(927~989)는 고려 6대 왕 성종을 도와 고려 사회에 유교를 정착시킨 문신이다. 통일신라시대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증손으로 열두 살 때 태조 왕건 앞에서 ‘논어’를 줄줄 욀 정도로 총명했단다. 하지만 정치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은 건 성종 즉위 이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유교를 강조한 ‘시무 28조’로 오랜 기간 닦은 내공을 표출한 셈이다.
‘시무 28조’는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시무 7조’ 덕에 유명세를 치렀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과 경제 정책을 신랄하게 꼬집은 ‘시무 7조’는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건의한 ‘시무 십여조’와 ‘시무 28조’를 한꺼번에 떠올리게 했다. 시무(時務)는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일, 즉 당대의 현안이란 뜻이다.
최승로가 이번엔 ‘경찰공무원(순경) 공개경쟁채용시험’에 등장했다. 그가 고려 태조부터 혜종 정종 광종 경종까지 다섯 왕의 치적을 평가한 ‘5조정적평’(五朝政績評)의 내용을 묻는 한국사 문항에서다. 지난 19일 치러진 이 시험에 5만 명 이상이 응시했다. 한국사는 영어와 함께 필수 과목. 그런데 이 문항을 두고 응시생들의 볼멘소리가 요란하다. ‘그냥 5초 정적하게 만드는 문제’라는 반응이 그 예다. 시쳇말로 역대급 난이도라는 이야기다.
공무원 채용 시험의 난이도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17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직무와 상관 없는 지엽적인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한 의원은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서 여론조사를 했더니 현행 시험 만족도가 10점 만점에 4.3점 나왔다”며 목청을 높였고, 당시 인사혁신처장이 “시험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했으나 변죽만 울린 격이다.
게다가 이번 시험에선 잘못 출제된 문항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시험장에서 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형평성 시비까지 불거지면서 경찰청이 단단히 체면을 구겼다. 선택 과목인 경찰학개론 가운데 한 문항의 잘못된 부분을 감독관이 칠판에 고쳐 적는 시간이 시험장마다 일정하지 않아 사달이 난 것. 가장 공정해야 할 공채 시험에서 불공정 시비를 자초한 만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마침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녹지원에서 청년의날 기념식 연설을 하며 ‘공정’이라는 단어를 모두 37번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청년의 눈높이에서 공정이 새롭게 구축되려면 채용, 교육, 병역, 사회, 문화 전반에서 공정이 체감돼야 한다”고 했다. 공정 체감, 멀어도 한참 멀었다.
정상도 수석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