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국내 개봉된 ‘타워링’은 야간에 130층의 초고층 빌딩에서 발생한 화재를 다룬 영화다. 건물 중간층에서 전기 합선으로 발화된 불은 강풍을 타고 급속히 상층부로 확산됐다. 시간이 갈수록 건물 내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는 극에 달했다. 소방대원들은 진화에 사투를 벌였지만 불감당이었다. 마치 생생한 화재현장을 목도하고 있는 듯한 영화 장면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지난 8일 밤 울산에서 이 영화를 방불케하는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한 밤중에 갑자기 발화한 불은 순식간에 건물 외벽을 타고 위로 번져 지상 33층 건물 한면이 시뻘건 화염에 휩싸였다. 강풍주의보까지 내려진 상황이라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건물에는 127가구 380여 명이 입주해 있는 데 밤 11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이라 대부분 자고 있었다. 초대형 인명피해가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기적이었다.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전 입주민이 무사히 화재 현장을 빠져 나온 것이다. 93명이 연기를 마셔 경상을 입었을 뿐 77명이 옥상과 피난층에 대피해 있다가 구조됐다. 연 인원 1300여 명이 투입돼 15시간40분 만에 진화된 고층 건물의 대형 화재 결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우선 입주민의 침착한 행동이 빛났다. 주민은 당황하지 않고 서로 이웃집 문을 두드려 화재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소방대원 유도에 따라 차분하게 대피했다. 생명의 위험을 뒤로 한 채 화마에 적극 맞선 소방대원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종합하면 한 마디로 모든 매뉴얼이 잘 작동된 결과였다.
반면 아쉬운 점도 있었다. 70m 높이의 고가사다리차(23층 건물 화재 대응 가능)가 울산에는 단 한 대도 없었던 것이다. 부산서 지원받은 고가사다리차가 현장에 도착하는 데는 1시간 넘게 걸렸다. 이런 정도라면 진화의 골든타임을 놓쳐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마라톤 진화작업에 투입된 소방대원들이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해야 할 회복차량은 아예 없었다. 인근 건물 바닥에 주저앉아 기진맥진한 상태로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은 G20국가의 국가직공무원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 소방관계자 말을 빌면 지난 4월 소방공무원이 국가직으로 전환됐지만 장비나 처우 등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전혀 나아진 게 없다고 한다. 이번 화재가 이런 후진성을 조속히 개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사회2부 jgba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