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리어카에 드럼통을 싣고 음식점과 가정집을 돌며 잔반을 모아 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 모은 잔반으로 돼지를 키운다는 사실을 알고는 한동안 돼지고기를 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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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반으로 키우던 재래종 돼지. |
농경사회에서 소는 핵심적인 농기구였다. 넓은 면적을 농사짓는 데 소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평생 일만 하던 소는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을 남겼다. 그럼에도 소는 인간이 먹는 것을 탐하지 않았다. 평생 풀과 여물만 먹었다.
돼지는 땅을 갈지도 수레를 끌지도 않았다. 오로지 먹기만 했다. 잡식성인 돼지는 풀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인간의 식성을 빼닮았다. 하는 수 없이 인간의 음식을 나눠 먹이며 키웠다. 그게 잔반이다. 그나마도 사정이 괜찮을 때 일이다. 한국전쟁 직후 인간이 먹을 음식조차 부족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 유일하게 음식이 남아도는 곳이 있었다. 미군부대였다. 미군부대 잔반은 돼지에게로 안 가고, 인간이 먹었다. 돼지를 키우던 잔반이 인간의 생명줄이 됐다. 그래서 ‘꿀꿀이죽 ’명칭은 처절하고 비극적이다. 꿀꿀이죽은 이것저것 마구 섞인 죽이 아니라 돼지가 먹던 죽이란 의미다.
굳이 이렇게까지 돼지를 키웠던 건 죽어서 존재감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신에게 올리는 제사는 인간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민원을 접수하는 행위다. 부탁하는데, 맨입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 제물이 필요했다. 생명 있는 것을 바칠수록 절실한 의지가 전달된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살아서 역할이 분명한 가축을 바칠 순 없었다. 제물로서 돼지만큼 적합한 동물도 없었다.
제사가 끝나면 축제가 시작됐다. 돼지가 제물로 바쳐지는 날은 곧 인간이 고기를 먹는 날이다. 그런데 한반도 재래종 돼지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먹을 것을 나누며 애써 키워봐야 60㎏이 안 넘었다. 여기서 얻는 고기는 겨우 30kg 남짓. 축제를 즐기고 경조사를 치르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분배의 정의를 실현할 방법이 필요했다. 머리·뼈·내장 등을 모두 넣어 끓여서 국물을 얻고, 밥이나 면을 말고, 고기 몇 점을 올렸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축제다운, 잔치다운 분위기가 연출됐다. 돼지국밥의 탄생이다.
공동체 중심 농경사회에선 이 정도로 충분했다. 산업화가 되고 인구가 급증하자 공리주의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대량 사육의 핵심은 속도·효율성. 요크셔, 랜드레이스, 듀록이라는 외래 품종을 섞어 ‘YLD’라는 삼원교잡종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품종은 혁명적이었다. 태어날 때 1.5㎏이었는데 6개월 만에 110~120kg까지 성장했다. 지방도 적어 훨씬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축제나 경조사가 아니라도 고기를 맛볼 수 있게 됐고, 거리마다 삼겹살집이 넘치고,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돼지고기 굽는 연기를 피울 수 있다.
더는 잔반으로 돼지를 안 키운다. 옥수수와 대두박에 비타민, 미네랄 등 각종 기능성 성분을 섞은 배합사료를 먹고 자란다. 인간에게도 돼지에게도 꿀꿀이죽은 추억이 되었다.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