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탈’이라 일컫는 ‘마스크(mask)’는 단순한 ‘가면(假面)’이 아니다. ‘마음의 얼굴’이다. ‘인격(人格)’의 어원인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가 고대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지방에서 죽은 사람에게 씌우는 마스크의 이름으로 불렸다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작곡가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를 보면 마음의 얼굴이 잘 드러난다. 우뚝한 콧날, 도드라진 광대뼈, 초월한 듯 감은 눈. 오스트리아의 화가 요제프 단하우저가 만든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에는 불멸의 예술혼이 오롯하다. 이는 프랑스의 조각가 앙투안 부르델이 데드 마스크나 다름없는 베토벤의 두상(頭像) 제작에 매달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80여 점의 베토벤 두상을 남겼는데, 물결치듯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특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마스크는 영원히 기리고 싶은 인격이다.
마스크에는 전염병 등 재앙에 대비한 ‘액막이’ 기능도 있다. ‘서울 밝은 달밤에/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들어와 자리를 보니/다리가 넷이로구나/둘은 내 것이지만/둘은 누구의 것인고/본디 내 것이다만/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삼국유사에 실린 처용 설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처용이 노래(향가 ‘처용가’)와 춤으로 물리친, 아내를 범한 사내의 본모습은 역신(疫神·전염병 귀신)이었다. 역신은 처용 형상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이후 처용 마스크는 방역의 상징이 되었다.
마스크는 미세먼지 오염에 이어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늘 쓰고 다녀야 하는 생필품으로 자리잡았다. 마스크를 쓴 인간, ‘호모 마스쿠스(Homo maskus)’의 탄생이다. 올해 들어 코로나19로 경제 활동이 위축되면서 미세먼지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최근 방역에 성공한 중국의 공장 가동 재개로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난 20일 중국발 스모그의 유입으로 서울 경기 충청 등 중부 지방의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비말차단용 마스크 대신 방진·보건용 마스크 착용을 권했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마스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그렇다면 마스크의 의미를 보다 긍정적, 발전적으로 바꿔보는 건 어떨까. 비말차단이나 방진에서 더 나아가 액막이나 인격을 담아내는 차원으로 격을 높여보자는 이야기다. 그러려면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고 어려움을 함께하려는 공동체의식(사회적 마스크)이 필요하다. 먼저, 지금 부산에서 가장 고통받는 북구 만덕(萬德)동을 그 중심에 놓자. 그리하여 동네 이름처럼 만 가지 덕이 깃든 마을로 거듭나도록 돕자.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