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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칼럼] 신념이 성숙하는 계절, 가을 야구를 사색하며

  • 김용석 문화비평가
  •  |   입력 : 2020-10-22 19:14:57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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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이 성숙하는 계절.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 나오는 말이다. 주인공 포레스터는 한 권의 소설을 출판한 후 40여 년 동안 은둔하는 작가이다. 그의 젊은 시절 열정은 형과 함께 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70세 노인이 된 그는 수많은 책이 꽂힌 서가 한 편에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 스위치히터였던 미키 맨틀의 사인볼도 두었다.
   
그림 서상균
뉴욕 양키즈 팬인 그는 회상하며 말한다. “우리는 여름 내내 양키즈의 모든 게임을 보기 위해 스타디움에 왔었지. 그리고 운이 좋으면 가을에도 올 수 있었어.” 그가 말하는 ‘운’이란 응원하는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가을 야구’를 즐기는 것을 뜻한다. 그는 작가가 된 후 ‘뉴요커’ 지에 ‘야구 최고의 해’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 글의 부제가 ‘신념이 성숙하는 계절’이었다.

야구의 포스트시즌에는 모든 신념이 성숙해간다. 선수와 구단이 시즌 초 세웠던 목표에 대한 신념이 완성돼가며, 팬들이 정규 시즌 내내 그들에게 보여주었던 신뢰와 믿음이 열매 맺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팀을 응원하든 상관없이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별난 스포츠에 걸었던 ‘인간적 위안을 위한 기대’가 보상받는다.

여기서 인간적 위안이라는 특별한 표현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게 야구는 가상의 작가 포레스터 이상으로 인간적 의미가 있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야구는 인심 좋고, 인간미 넘치며, 무엇보다도 인문적 감동을 주는 경기이다.

야구는 집에서 출발해 집으로 돌아오는 경기다. 타자가 주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점수를 얻어가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집(Home)이란 말은 더없이 소중하다. ‘홈인’과 ‘홈런’처럼 말이다. 다른 많은 경기에서는 공이 정해진 공간에 들어가야 점수가 난다. 야구에서는 ‘사람’이 ‘집’에 돌아오면서 점수를 낸다.

공으로 점수를 내는 경기에서는 공이 소중하다. 웬만해서는 시합 중에 공을 바꾸지 않는다. 시합 중에는 관중에게 공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야구에서는 사람이 점수를 내므로 공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야구는 시합 중 관중에게 가장 많은 공을 선사하는 경기이기도 하다. 참으로 인심 좋은 경기다. 공들은 떠나고 사람은 집에 돌아오는 경기, 여기에 야구 고유의 인간미가 있다.

야구에서 받는 감동이 각별히 인문적 차원을 획득하는 순간은 경기 중 ‘부수적인 지원’이 필요할 때이다. 이런 지원은 대안, 희생, 구원 그리고 기다림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실 결코 부수적이지 않은 것들이다. 더구나 우리가 일상에서 기꺼이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야구 경기에서 서로 돕고 지원하는 장면들은 그때마다 우리에게 생활을 반성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야구는 수시로 대안을 제시하며 문제를 풀어가는 경기다. 공격하는 팀에서는 대타와 대주자를 적시에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일상의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희망사항일 뿐 잘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누가 대신 나서고 대신 뛰어주는 ‘인생의 대타와 대주자’는 결코 흔치 않다. 팀을 위해 필요하면 번트와 외야플라이로 ‘희생’하는 선수가 등장한다. 이는 사실 팀 전체의 ‘공생’을 위한 행위이지만, 우리 일상에선 공생을 위해 누군가 선뜻 나서는 일도 드물다.

수비하는 팀은 위기 때마다 중간 계투 등, 여러 명의 구원투수를 기용할 수 있다. 투수 교체 때마다 새로 등판하는 투수가 연습 투구를 할 수 있도록 꽤 오래 기다려 주기도 한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나를 구원하기 위해 누군가 항상 준비돼 있고 언제나 나서는 경우가 일상사는 아니다.

때론 위기의 순간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처지에 빠지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야구는 우리가 일상에서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삶의 가치들을 역설적으로 매 경기 보여주고 있다.

야구에 관한 내 추억도 ‘품위는 없지만’ 포레스터 못지않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 야구를 했는데, 공 말고도 글러브와 배트가 필요해 당시에는 드문 일이었다. 마침 야구광인 고등학교 학생이 있어 동네 아이를 모아 야구 시합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밖에 안 된 1960년대 초, 글러브를 가진 아이도 별로 없었다. 그때는 두꺼운 비닐우산을 많이 썼는데, 못 쓰게 된 우산에서 비닐을 떼어내 글러브 모양으로 몇 겹 접고 굵은 실로 꿰맸다. 비닐 사이에 신문지나 두꺼운 마분지를 접어 넣어 보강하기도 했다. 그래도 공을 받으면 손이 아팠고 비닐은 찢어지기 일쑤였다.

당연히 제대로 된 가죽 글러브를 가진 아이들만 포수와 투수 그리고 내야 수비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유격수를 볼 실력이었는데도 항상 외야로 밀려나곤 했다. 동네야구 ‘단장’인 고등학생 형한테 “형, 형도 잘 알잖아. 나 숏 좀 보게 해줘!”(전후 미국 문화 영향이 커 ‘숏스탑’이라는 말을 썼다)하고 항의 겸 애원하기도 했다. 시합하다가 공에 맞아 왼쪽 눈을 실명할 뻔했고, 오른쪽 어깨가 탈골됐다. 그래도 가죽 글러브를 선물 받았던 날의 기쁨이란!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얼추 포레스터의 나이가 된 지금 시합은 못 하지만 야구를 보며 음미한다. 그것의 인문적 속성이 나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인볼은 아니지만 롯데 자이언츠의 홍보용 야구공 하나 서가에 올려놓았다. 책과 영화디스크만 빼곡한 서가 한 편의 야구공은 나름 파격적 미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가을 야구가 한창이다. 우리 프로야구에서는 정규시즌이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월드시리즈가 시작해 야구의 신념이 그 성숙의 절정에 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시즌이 늦게 시작했지만, 예년 같았으면 한국시리즈의 시기다. 사정이 이러니 올해는 리그 순위 결정을 위한 막바지 경쟁이 치열한 요즘도 가을 야구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고 한다. 야구를 사색한다고 누가 뭐라 하겠나. 이렇게 즐기는 가을 야구는 인문적 자양분과 함께 더욱 성숙해지지 않을까.

철학자·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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