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사에서 조선 초기의 회화 작품은 그 수가 매우 적다. 임진왜란 정도로 시기를 늦추어도 미술사를 구성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조선 초기 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집중되는 것도 다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런 중에서도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비견되는 작가와 작품이 있는데, 바로 조선 초기 문인으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리는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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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안 ‘고사관수도’. 국립중앙박물관 |
가파른 절벽 밑으로 흐르는 물 위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한 선비가 엎드려 물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문 화가가 아닌 선비 화가의 그림으로는 작은 화면을 잘 구획한 솜씨와 인물 표정의 묘사가 뛰어나 명품으로 꼽힌다. 남종문인화의 표본이 되는 구성인 데다, 중국의 절파(浙派) 화풍이 전래해 온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그동안 전문가들이 그토록 호평하였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진위에 대한 논란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의 구성이 1679년에 출판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들어 있는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과 매우 닮아 강희안의 생존 시기가 맞지 않고, 절벽·잡초·넝쿨 등을 그린 화법도 16세기 명나라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와 비슷하여 이 또한 시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작품은 강희안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어느 화가가 중국화풍을 변형하여 그린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동안 학계에서 이 작품을 진품으로 본 것은 작품 속에 강희안의 호인 ‘인재’(仁齋)라는 인장이 있고, 오래전부터 박물관에 소장되며 강희안의 작품으로 인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 이 인장은 새긴 방법과 종이에 인주가 배어 들어간 느낌 등으로 보아 후대에 찍힌 것으로 공감하는 추세이다. 이른바 세상에서 말하는 ‘후낙관(後落款)’이라는 것이다.
한 20여 년 전 어느 날이었다. 지인의 부탁으로 한 미술품 수장가의 집에 그림을 감정하러 간 적이 있었다. 여러 점의 작품을 보았으나 가장 궁금해하던 작품은 제법 오래된 산수화 두 점이었다. ‘인재(仁齋)’라는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마침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 찍힌 인장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림은 조선 후기의 것이 분명하여 도저히 강희안의 것이라 할 수 없어 대충 둘러대고 나왔다. 그때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던 시절이 아니라 그냥 돌아오고 말았는데, 간혹 ‘고사관수도’를 볼 때면 그때 사진을 찍어 두었으면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아쉬워하곤 한다.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