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을 앞둔 1998년, 서울의 어느 대학교수가 썼던 글이 떠오른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한반도의 지난 천년은 중앙집권, 수도 중심, 서울 일극주의의 역사였다. 통일 신라와 고려·조선 시대에 일관되게 유지되었고, 해방 후에는 그 구조가 더욱 깊어졌다. 권력이 중앙정부에 집중되고, 사람과 자원은 서울로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하다. 21세기에는 한반도 역사의 흐름을 바꿔서 탈중심 탈중앙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물꼬를 트지 않으면 안 된다. 전국 어느 곳에서나 잘 살 수 있는 지역발전과 지방문화 육성이 그 요체다.

하지만 2020년이 저물어 가는 지금도 한국의 중앙집권주의는 변함이 없다. 그만큼 뿌리가 깊고 질기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다’는 것처럼 수도 서울을 빗댄 우리 속담도 숱하게 많다. 수도권 위주의 사고방식은 그러한 토양에서 자라나고 우리 사회에 퍼져나갔다.

가덕도 신공항 추진에 대해 서울 언론과 중앙세력이 딴지를 거는 행태에서 새삼 뼈저리게 느낀다. 그들은 김해신공항(기존 공항 확장안)이 검증위원회에서 백지화로 귀결되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마구 내지르는 포퓰리즘’이니 ‘가덕도 밀어붙이기’니 하며 화살을 쏘아댔다. 검증위가 지난해 말 출범하고 한참 뒤에 내년 4월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정해졌는데도,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몰아붙인다. 심지어 “활주로에서 고추를 말리게 될지도 모른다”거나 “고추 대신 멸치 말리는 공항이 될 것”이라고 비꼬았다.

하기야 수도권 중심의 보도와 왜곡된 시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태풍 때만 되면 주로 수도권 통과 여부에 초점을 맞추는 게 단적인 사례다. 그렇다 해도 부산 울산 경남의 숙원사업에까지 고춧가루를 확 뿌리니 지역민의 분노를 사고도 남는다. 그런 점에서 30년 전 ‘수도권 새 국제공항’ 혹은 ‘영종도 신공항’ 이라 불린 인천공항의 건설 추진과정을 되짚어보는 게 필요하다. 현재 상황과 대비되고 시사하는 바가 큰 까닭이다.

인천공항 건설계획은 1989년 공식 발표되었다. 영종도~용유도 사이의 바다·갯벌을 1000만 평 넘게 매립해 만드는 것이다. 이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일부 단체는 서울 김포공항 확장이나 다른 입지 등의 대안을 제시하며 백지화를 요구했다. 막대한 건설비와 지나친 규모, 열악한 접근성, 수도권 집중 가속화, 해안 환경 파괴, 경제성 부족 등 20개 이상의 문제점이 담긴 연구보고서까지 내놨다. 하지만 서울 언론은 여기에 눈을 감은 듯 보였고, 정부는 밀어붙였다. 더구나 영종도~인천 연륙교, 서울과 연결하는 고속도로·전철 건설 등의 기반 조성에 예산을 쏟아부었다. 신공항건설촉진법이 제정된 건 물론이다.

사실 영종도 신공항은 부산 신공항과 함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1987년 말 대선 당시 노 후보는 부산 수영만을 메운 청중 앞에서 이를 내세웠다. 당선 후 1989년 부산시 초도순시에서도 이를 거듭 밝혔다. 그 무렵 부산에서는 가덕신항만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 신공항 건설도 병행되어야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해공항의 항공수요가 폭증하면서 부산권 중심의 신공항 조성 필요성이 한층 높아진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두 곳의 운명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가덕도 신공항이 시간만 끌다가 무산된 반면, 영종도 신공항은 1992년 기공식 이후 착착 진행되었다. 가덕신공항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착수되었다면, 지금까지 허송세월을 하지 않았을 터다. 결과적으로 인천공항은 서울 김포공항의 급속적인 포화와 소음공해 피해 증가에 맞춰 추진되었고, 부산 신공항은 2002년 김해 돗대산 여객기 추락 참사 때까지 묻히고 말았다. 인천공항은 2001년 개항 후에도 확장을 거듭해온 데 비해 부산 신공항은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의 단골 메뉴로 이용되었고, 지역민은 희망고문을 겪어왔다.

수도권 쪽에서는 가덕신공항의 경제성을 지적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해신공항의 안전 결함이나 항만·항공 복합물류 육성, 새 성장동력, 지역균형발전 등을 감안하면 경제적 필요·타당성이 충분하다. 영종도 공항 때의 경제성 논란이나 회의적 시각에 비하면 오히려 더 낫지 싶다. 만일 김포공항 확장에 그쳤다면, 인천공항이 세계 톱클래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주지하듯이 김해공항은 이미 포화 상태이고, 동남권의 국제항공 수요는 그 한계용량을 넘었다. 땜질식 보강이나 확장으로 될 일이 아니다. 국내 항공화물만 해도 98%가 인천공항에 쏠린 실정이다. 여기에다 지역민이 인천공항을 오가는 경제적 비용이 연간 7000억 원이고, 2030년에는 1조 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제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수도권 중심주의에 눌려 지역의 균형적 발전이 희생되는 불행은 더는 없어야 한다.

선임기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