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의 첫 비디오는 대우 베타맥스 비디오였다. 비디오 테이프가 다른 집 비디오 테이프보다 작아서 더 멋져 보였었다. 하지만 곧 작은 비디오 테이프는 퇴출되었다. 작은 비디오 테이프가 사라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크기도 작고 고화질 영상이었지만 시장은 VHS(Video Home System)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대부분 사용자들이 큰 비디오 테이프 사용에 불편함이 없었고, 보다 다양한 콘텐츠가 있었으며, 초기부터 빌려서 볼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었다. 고화질, 작은 크기의 유리함이 실제 사용자의 편리함보다는 작았던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어떤 기술 또는 시스템을 만들 때 개발자 또는 운영자 측면을 너무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비즈니스는 고객의 미충족 욕구를 실현해줄 수 있을 때 또는 고객 자신은 무엇이 필요한지 몰랐지만, 고객이 열광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때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이런 생각들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고, 현재도 끊임없이 재연되고 있다. 마차와 자동차, 삐삐와 핸드폰 그리고 스마트폰이 그 증거들이다.

변화의 중심에 있으려면 사람의 욕망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살고 싶어한다. 단순히 일년을 더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즐겁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을 구체화하고 실현하는 것은 혼자서, 또는 스스로 할 수 없다.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노력해 여러 가지 해법을 찾아내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참하고 문화를 바꿀 수 있도록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하고 전문가들은 자기 중심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실제 사용자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해결책이라 하더라도,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들을 설득해내지 못한다면 작은 비디오 테이프처럼 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국민건강보험, 편리한 의료 접근성, 우수한 의료기술 등 세계가 부러워하는 의료시스템을 갖춘 나라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료시스템은 허물어지고 있다. 정부, 의료진, 심평원, 보험회사 등 소위 의료시스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전문가 집단들이 상시 협의하지 못하고, 서로 남 탓을 하는 통에 우리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보완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진 지금, 의료도 언제까지 이전 상태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디지털 헬스케어는 우리가 시작하지 않더라도 인터넷 시대의 큰 물결에 의해 반드시 쓰나미처럼 우리에게 몰아칠 것이다. 아무런 특수 장비도 필요 없이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소통하는 신인류에게 의료 부문만 외딴 섬을 만들어 통제할 수 있을까? 나는 진심으로 걱정스럽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전문가들이 서로 각 직역에서 한발 물러서서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해결책을 만들어갔으면 한다. 세상은 넓고 우리 의료기술로 잘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많다.

부산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