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참 낯간지러운 날이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이자 대한민국 쇼트트랙의 간판선수가 고교 2학년 때부터 3년 넘게 스승한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당나라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소식에 ‘설마’라며 애써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설처럼 성폭행 사실이 밝혀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스포츠 분야의 인권침해 실태와 승리지상주의에 따른 문제점을 낱낱이 밝히고 근본적으로 개선하라고 지시한다.
대통령의 추상같은 지시로 지난해 2월 시민단체, 스포츠 인권, 체육계 등 민간위원 15명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교육부 장관 등 각 부처의 차관 5명이 당연직 위원으로 구성된 스포츠혁신위원회가 출범했다. 1년 동안 100차례가 넘는 회의를 통해 스포츠 ‘성폭력 피해자 보호·지원 체계 확립과 체육 단체 선진화를 위한 구조 개편’ 등 총 7차례에 걸쳐 권고안을 발표했다.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체육계에 비리가 발생하면 근본적인 문제부터 해결하겠다고 발 벗고 나서지 않은 정부가 없다. 2014년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태권도 선수 아버지가 심판 편파판정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정부, 경찰, 검찰이 연계한 합동수사반 사무소를 개설한 적이 있다. 당시 체육계의 부조리를 척결하겠다고 깜냥도 안 되던 사람이 완장 차고 나대던 시절이 생생하다.
그 이후에도 국가대표 출신의 유도 왕기춘 선수 성폭력 사건 및 철인 3종 경기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 등이 연달아 발생했다. 화들짝 놀란 정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어릴 때부터 친구, 선배, 코치, 감독 그리고 무늬만 체육인인 사람들한테 배운 못된 행동과 태도를 뿌리 뽑기엔 힘이 부치는 모양새다.
일부 사람 중엔 체육계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고 나면 으레 요즘 군대에서도 하지 않는 짓을 한다며 혀를 내두른다. 필자가 볼 때 체육계의 문제는 무식이 용감해서도, 또 맷집이 강해서라기보단 금메달이라는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고, 알면서도 묵인 방조한 결과라고 본다. 일부 체육학자, 언론 및 정치인 중엔 체육계에서 벌어지는 부패의 근본 원인을 성적지상주의에 따른 결과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점도 있지만 그 죄질의 모양과 강도를 보면 꼭 성적지상주의가 원인이라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김훈 작가는 H 신문 칼럼에서 ‘국영수는 용의 자리에 오르는 사다리였다. 용과 사다리만을 가르쳤고, 개천의 발원지나 유역, 수질은 가르치지 않았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체육인도 마찬가지다. 금메달 따는 것만 가르쳤을 뿐 인권을 포함한 ‘생각의 근육’을 키워준 적이 없다.
체육인과 일반인의 집단 사고의 간격을 좁힐 방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체육인 중에서도 체육의 현재를 넘어 미래를 책임질 체육지도자의 인식 구조(수준)를 바꾸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순자의 권학 편에 실린 ‘흙을 쌓아 산을 만들면(적토성산, 積土成山), 비와 바람이 거기서 일어난다(풍우흥언, 風雨興焉)는 글귀를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우리 사회는 100년 동안 금메달 따는데 필요한 흙을 쌓아 세계 10위, 스포츠강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금메달 따는데 필요한 흙을 쌓아 스포츠강국이 된 것처럼 인문철학지식이라는 흙을 쌓아 ‘생각의 근육’을 길러준다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었던’ 부조리와 부정부패가 상식 수준에서 관리될 것이다.
현 정부는 ‘스포츠강국에서 스포츠선진국’으로 나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정치구호가 아닌 체육계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선 스포츠혁신위원회의 권고안은 물론 오랫동안 내재된 집단 사고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문철학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경기력 향상 중심 교육과 함께 ‘생각의 힘’을 길러줄 수 있는 커리큘럼이 개설되길 희망한다. 인문철학교육을 통해 ‘생각의 힘’, ‘생각의 근육’이 길러진다면 반드시 ‘깨어있는 체육인’으로 거듭날 것이라 확신한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는가.
동서대 체육학과 교수·전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