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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삼장(三章)의 철학 /정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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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12-31 19:50:34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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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온 시간만큼 먼 미래는 과연 어떤 형국일까? 모든 기록이 사라진다 해도 문자는 살아남을 것이다. 바위벽에 아슴푸레 남은 암각화, 또는 각석에 나타난 형이상학적 형체가 그것을 증명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나 자신을 알게 하는 것이 문자의 기록이며, 시대의 삶을 추스르고 예술로 승화한 것이 문학작품이다. 괴테나 셰익스피어 같은 대문호와 세레나데 혹은 단테의 ‘신곡’ 같은 서양 분위기가 있는 반면, 동양에는 극사실로 묘사된 백거이의 아름답고 슬픈 ‘장한가’와 ‘비파행’, 광활한 중국을 호령한 나관중의 ‘삼국지’가 있다. 특히 우리에겐 보배라 할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가 있고 황진이가 뭇 남정네의 오장육부를 다 녹아내리게 한 불멸의 연시(戀詩) ‘동짓달 기나긴 밤’이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 전문).

어떤가? 이쯤 되면 말이 필요 없고, 행동은 가식이며, 마사여구마저 군더더기다. 오직 삼장 육구 십이음절 안에 삼라만상 심오함이 다 들어 있지 않은가. 시조는 우리 고유 문학의 핵이자 예술 사상의 중심축이나 다름없다. 시공을 축지법 쓰듯 오가는 오늘날 시조라는 말을 꺼내면 고대 먼 나라 얘기쯤으로 말하는 이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시조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의 의식주요 철학이다. 시조 삼장으로 형성된 가락에는 모든 것을 풀무질해 녹여낸 한과 그리움, 절망과 희망, 미래 비전까지도 다 함축돼 있다는 말이다. 가령 현대시조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냉이꽃’을 보자.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가람 이병기 ‘냉이꽃’ 셋째 수)

무기는 만들 수 있어도 작은 냉이꽃 한 잎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다. 자연이 피우는 생명의 힘은 위대하다.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가 시조 삼장에 함축돼 있다.

코로나19로 이만저만 불편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다. 중동의 화약고, 테러, 거기다 예측 불가능한 자연재해까지, 그 어떤 게 진정한 삶의 해답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너무 걱정할 일도 아니다. 지형을 단숨에 바꾸는 소용돌이는 때가 되면 순한 양이 된다. 작든 크든 자기가 지향하는 꼭짓점을 향해 열과 성으로 나아감이 무게중심의 대들보나 다름없다. 거기에는 문학이 우리를 위무하고 응원하고 있다. 시조 삼장에 깃든 철학은 따지고 보면 뭐 대단한 것은 아니다. 대가성 없이 내비친 순수성으로 우리 삶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쩜 오늘날 현실을 노래할 수 있는 우리는 제일 행복한 세기에 머무는 선택된 사람일 것이다.

삼촌 가계 이름은 행복 열쇠입니다 / 대문 열쇠 현관 열쇠 책상 열쇠 가구 열쇠 / 행복한 마음을 담아 열쇠를 만듭니다 // 사람 마음 여는 열쇠 만들 수 있으시죠 / 윤지 마음 활짝 열어 짝꿍 되고 싶은데 / 화들짝 웃는 삼촌 보며 가로수도 빙그레 (졸작 동시조 ‘행복 열쇠’ 전문)

부산시조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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