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굴암 입구 광장에서 새해 해맞이를 했던 어느 해 이야기다. 꽤 추운 날씨였으나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매서운 바람을 견디기에 충분했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일출을 기다리던 생면부지의 많은 사람이 한껏 들뜬 기분으로 덕담을 나눴다.
사달은 그 뒤에 생겼다. 일출을 본 벅찬 마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그 선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이와 노인들이 떠밀리면서 울음 소리가 터지고, “질서를 지키자”는 간곡한 목소리는 우격다짐에 묻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날 교통 혼잡과 안전 사고를 막고자 개인 차량 운행이 통제됐다. 불국사 주차장에서 무료 셔틀 버스가 오갔다. 올라올 때와 달리 내려갈 때는 한꺼번에 사람이 몰렸다. 적은 관리요원으로 버스 대기 줄을 유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줄이 무너지면서 먼저 버스를 타고 내려가려는 사람들로 일대가 난장판으로 변한 것이다. 30분쯤 지났을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광장이 조용해졌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애들 보기가 민망했다. 질서가 무너진 현장, 수치심을 떨치기 어려운 해맞이 악몽이었다.
미국이, 미국을 바라보는 세계가 그런 수치심에 휩싸였다. 대통령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의회의사당을 유린하는 초유의 유혈 폭력사태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를 법적으로 인증하는 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잔칫상을 뒤집어 엎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거대한 불명예와 수치의 순간”이라고,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이건 미국이 아니다”고 개탄했다.
‘자유와 평등의 나라’ 미국을 떠받치는 건 공정한 선거와 자유로운 투표, 평화적인 정권 교체로 이뤄지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의회로 몰려가기 앞서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도둑질을 멈추게 할 것”이라며 이들을 독려함으로써 미국의 가치를 스스로 저버렸다. 선거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부메랑이 됐다. 골수 지지층을 바탕으로 포퓰리즘에 의지하는 트럼프식 정치의 비극적인 단면이다. 그 파편이 미국 민주주의의 심장인 의사당의 처참한 몰골이다.
20년가량 된 해맞이 악몽이 지금까지 생생하듯, 이 사태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민낯을 반추할 때마다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끄집어내는 하루’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정상도 수석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