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아, 너는 춘향전을 읽은 일이 있느냐?”
문득 들려온 이 구절에서 백기완 선생이 떠올랐다면 그는 분명 1980년대를 풍미한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일게다. 백기완 수상집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제목은 유행가 ‘찔레꽃’의 한 소절을 흥얼거리게 할 정도로 서정적이지만, 사실 이 책은 선생이 유신독재 치하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수감 중이던 1979년 봄 작정하고 쓴 문화비평서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니, 서간집이라고 해도 되겠다. ‘국토’의 시인 조태일이 운영하던 출판업체 ‘시인사’에서 펴낸 이 책은 그러나 인쇄된 지 24시간도 안돼 금서(禁書)가 되는 비운을 겪는다. 하지만 책은 이미 대학가와 노동계로 퍼져 필독서가 되었고, 80년대 대학가에서는 반민주·반민족·반통일 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일깨워 시대의 흐름을 바꾼 ‘한 권의 책’이 됐다. 책 속에서 끊임없이 호명되는 ‘담이’는 이 시절 젊은이들의 친숙한 여동생 이었다.
선생은 책 초반부 ‘시를 쓰고자 하는 딸에게’에서 장산곶매 전설을 들려준다. 황해도 구월산 줄기가 뻗어내린 장산곶 숲속에서 가난한 자들과 평화롭게 살던 장수매가 어느 날 운명을 건 일전에 나선다. 대륙에서 날아와 사람들을 해친 독수리에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힘 센 독수리와의 생명을 건 일전에 앞서 장수매는 부리로 자신의 둥지를 허문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받으며 처절한 싸움 끝에 승리한 장산곶매는 큰 상처를 입고 낙락장송에 내려 앉았다가 구렁이에게 물릴 뻔하지만, 이 또한 물리치고 하늘 높이 힘차게 날아오른다.
책에서 선생은 묻는다. “담아, 너는 장산곶매 전설에서 무엇을 깨닫느냐?” 대답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장산곶매의 성격은 분명하다. 첫째는 민족 자주성이다. 대륙에서 날아온 독수리, 즉 외세에 대항해 하나로 뭉쳐 처절하게 투쟁한 우리 역사를 상징한다. 다음은 약자를 위해 싸우는 민중의 대변자다. 세 번째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자유 정신이다.
어제 89세를 일기로 영면한 백기완 선생을 보내며 곰곰이 돌이켜본다. 평생을 외세와 독재에 저항하며 민족통일운동, 민주화 운동, 노동자·농민운동에 바친 선생이야말로 어쩌면 전설 속 저 장산곶매와 같은 삶을 산 것 아니겠는가. 영원히 변치 않는 푸른 날갯짓으로 날아 오르는 ‘해동청 보라매’처럼 하늘에서도 형형한 안광을 번득이며 이 땅의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파수꾼이 되어 주길 소망해 보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